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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감투

admin 기자 입력 2016.03.03 22:21 수정 2016.03.03 10:21

↑↑ 권춘수 박사
ⓒ N군위신문
감투는 벼슬하는 사람만 쓰는 의관이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초가을 어느 아침. 동네에서 나보고 “산감을 맡아 달라고 하더라”하며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식구들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아버지의 갑작스런 말씀에 놀랐다. “당신은 감투 쓸 자격이나 되나 농사짓는 주제에.” 어머니가 못마땅한 듯 벌컥 언성을 높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언짢게 생각하지 않고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흘러 보였다.

아버지는 산감을 세상에서 제일 큰 벼슬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어려운 살림살이에 벼슬이란 엄두도 못 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역정을 부렸다. 밥 한 술 뜨고선 가는 곳이라 고작 산과 들뿐이었다. 지식이라고는 봄이면 밭 갈고 씨 뿌릴 줄 알고, 여름이면 김매고 가을 이면 곡식 거두어들일 줄 아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 가지고 무슨 산감을 해, 당치도 않는 소리였다. 어머니가 화를 낸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남달리 산과 나무를 사랑했다. 동절기에 같이 나무하러 갈 때면 습관처럼 늘 그랬다. 풀숲에 둘러싸여 자라지 못한 어린 소나무를 보고 풀을 베어내고 나무가 잘 자라도록 손질해주었다. 떡갈나무이며 낙엽송 등 어린 잡목까지도 그렇게 했다. 손질 한 후 나무들이 곧게 서있는 모습을 보면 키가 훨 씬 더 큰 것 같아 보였다. 보기가 참 좋았다. 아버지의 따뜻한 참사랑과 정성에 감사하는 듯 나무 잎들도 바람 따라 살랑거리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낫으로 어린 소나무를 마구잡이로 끊어버렸다. 나무 밑에 수북이 쌓인 솔가리를 까꾸리(갈고랑이)로 땅이 보이도록 싹싹 끌어 모았다. 내가 나무했던 자리는 빗자루로 마당을 쓰렸듯이 깨끗했다. 아버지가 했던 자리에는 보이지 않았던 어린 나무들이 늘씬한 몸매로 촘촘히 서 있다. “니는 내가 그렇게도 말 했는데, 여태까지 뭐 듣고 있었노, 귀꾸멍 이라도 막혔나? 가지치기 하라고 했지 누가 어린나무를 몽땅 베라고 하드노?” 하며 벌컥 화를 냈다.

화목이 없어 닥치는 대로 나무를 해가지고 와서 부엌에 불을 땠다. 낫으로 두툼한 소나무 껍질을 벗기기도 했고, 갈고리로 나무 밑에 떨어진 솔가리를 하나 남김없이 긁어내기도 했다. 울창한 산림이 하나 둘씩 소리 없이 쓰러져 갔다. 산은 벌거숭이 되고 뼈만 앙상히 남았다.

아버지는 혀를 차면서 얼마 안가서 산은 모두 민둥산 될 것 같다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산과 나무를 가꾸며 보호하고 싶었지만 혼자 힘으론 할 수 없었다. 산감이 되어야 산을 지킬 수 있겠다. 라고 생각했다. 산감은 아무런 보수와 힘도 없었지만 동네에서 추천했기 때문에 말 빨은 설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생각했던 산감이 되었다. 아버지 성품은 조용하면서도 완고한 편이었다. 어머니 역정은 온데간데없고 기어이 산감이 차고 다니는 완장을 가지고 왔다. 마루 한구석에 모셔놓은 신주 단지 앞에 완장을 놓고 무릎 꿇어 신주에 고하던 아버지의 참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아버지는 붉은 줄 세 개있는 완장을 끼고 싶어 했던 것 아니었다. 나무해가지고 오는 것을 조사해보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건성으로 하는 인사치례를 받고 싶어 했던 것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헐벗어가는 산을 푸르게 해보고 싶었던 마음뿐이었다.

“생각하면 이루어진다” 아버지의 뜻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칠팔 십 년대 산림녹화 사방사업 퇴비증산이란 표어가 등장했다. 조용하던 동네 어귀에 오리나무 묘목을 가득 실은 트럭이 짐을 내렸다. 사람들이 둘러서서 “이것 뭐 하는 것입니까?”고 담당자에게 물었다. “앞뒤 동산에 심을 묘목입니다”이라 했다.

밥 먹고 할 일 없던가봐 저걸 다 심으라고? “말도 안 된다” 하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담당자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냥 심는 것이 아니고 하루 일당을 주고 심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생계가 어려울 때, 하루 일당을 준다는 말을 듣고 난 뒤 어수선했던 순간이 삽시간에 조용해 졌다.

산에 나무를 심는다는 말에 제일 신바람 난 사람은 아버지였다. 완장을 차고 이른 아침부터 동네를 서성거리며 나무 심으러 빨리 나오라고 독려했다. 열 명씩 한 조를 이루어 일렬로 서서 긴 새끼줄에 표시한 눈표에 따라 묘목을 심었다.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수개월 동안 같은 작업을 계속했다. 나중엔 하기도 싫어지고 싫증도 났다. 하루는 또래들과 같이 하루에 심을 묘목을 다 심으면 놀기 때문에 묘목을 빨리 없애버릴 묘안을 짰다. 한 구덩이에 묘목 한 개씩 심어야 했는데 수십 개 되는 한 묶음을 한 구덩이에 집어넣고 묻어버렸다. 감독한테 걸렸다. “하기 싫거든 집에 가라”하며 산천이 떠나가도록 불호령이 내렸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사방공사가 무사히 끝났다. 몇 해 사이에 헐벗었던 산이 푸른 산으로 변했다. 속성과에 속한 오리나무는 성장이 무척 빠르게 자랐다. 산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리나무뿐이었다. 마치 오리나무 천국 같았다. 그 이후 은사시나무, 참나무, 침엽수, 아카시나무 등이 뒤따라 심었다. 모두 화목거리에 불과했지만 땔감도 잊어버리고 사람들의 마음도 한결 풍요로웠다.

여러 해 지났다. 나무들이 숨 쉴 공간도 없을 만큼 빽빽이 자랐다. 가지를 잘라내고 바람과 햇볕이 잘 들어오게 해주어야 했다. 동네에서 나무를 솎아내고 가지치기하기로 결의하였다. 낫과 톱으로 잘라 낸 나뭇가지를 한단씩 묶어 나무 밑 여기 저기 무더기로 나눠 놓았다. 누더기 옷을 벗은 듯 나무들은 쭉쭉 뻗어 늘씬 해 보였다. 나무 가지 사이로 파고드는 햇살과 바람에 숨통이 트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산감이 집집마다 제각기 표시한 지게 작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무작위로 나뭇단에 꼽았다. 자기 지게 작대기가 꼽힌 나뭇단이 자기 것이 되게 하였다. 산감 집 작대기가 무더기가 제일 큰 것에 꼽혔다. 자기마음대로 했다. 하며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나뭇단이 어느 정도 마른 뒤 집으로 가져오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동시에 가져오다보니 산은 소와 사람들로 분주했다. 소등에 질매(길마)를 얹고 나무를 실으려갔다. 나무를 실어올 때마다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산길 모서리에 돌이 툭 튀어 나온 곳이 있어 늘 신경이 곤두세워졌다. 그날따라 나뭇단 네 개를 실을려고 하다가 욕심스럽게 한 단 더 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를 가득 실고 내려오는 도중 염려하던 그 곳에서 큰 사고가 났다. 나뭇단 밑이 돌에 걸려 소가 나뭇단과 같이 넘어지고 말았다.

앞이 캄캄했다. 아무생각도 나지 않았다. 넘어진 소는 고통스러운 듯 계속 우~ 하며 울고 있다. 어찌할 바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아버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구세주보다 더 반가웠다. 도착하자마자 위안은 주지 못할 지언 정 “나뭇단을 네 단만 실고 다니라 했더니 네 고집대로 한 단 더 실어서 이 모양이 되었구나! 내 말 안 들으면 이 꼴이 되는 기라”하며 청천벼락이 떨어졌다.

뒤따라오던 소 행렬이 꼼짝 못하고 나뭇단을 실은 채 멍청이 서 있었다. 사람들의 부축으로 간신이 집에 도착했다. “빌어먹을 나무” 뭐 때문 이렇게 크게 자라 이토록 애 먹이나 하며 욕지거리 해댔다. 아버지가 애써 가꾼 푸른 산을 보고 기쁨에 넘쳐 쏟아낸 환성 이였다.

산감을 큰 감투로 여기고 살아왔던 아버지. 하늘나라에서도 꽃동산을 가꾸며 산감을 버리지 못한 체 완장을 차고 다닐 것만 같다. 헐벗었던 산이 울창한 산림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기뻐했던 아버지. 양팔뒷짐하고 지난 날 애환을 달래며 감개하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남들이 비웃던 말 던, 감투를 벼슬로 삼고, 모든 일을 깨끗이 마치고 만족해하던 아버지, 감투를 벗으면서 “내 말 명심코 들어라” 하신다. “감투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다”라며…

대구가축병원, 원장
수의학박사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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