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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보 작가 |
ⓒ N군위신문 |
자생란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중투(中透) 한 분쯤은 갖고 싶어 한다.
그래서인지 산채길엔 ‘중투, 중투’ 하면서 노래를 부르건만 중투는 상면에 지독히 인색하여 수년간 산채를 다닌 사람들 중에는 한 번도 알현(謁見)의 영광을 얻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다.
물론 첫 산채행에 알현한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중투를 오매불망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무늬 종의 백미(白眉)로서 명품이긴 하나, 좋든 나쁘든 중투라고 생긴 것은 촉당 100만원을 호가하고 있는 높은 값 때문에 더 갖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앞 이야기에서의 Y교수는 근무처인 목포에서 어떤 이의 소개를 받고 온 산채꾼으로부터 편호(片縞) 1촉을 거금(?)을 주고 구입하였다.
명색이 자생란을 즐기면서 중투 한 분 없는 것이 맘에 걸리기도 했지만, 잘하면 새 촉이 일을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리를 한 셈이었다.
그 편호는 주인의 뜻을 받들어 2년 연속 중투를 올려 주는 큰일을 저질렀다.
그 중투가 보고 싶어 근무처인 목포에서 서울 자택으로 전보다 자주 오르내렸을 정도였으니, 그 애지중지함이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막역한 사이가 되면 농반진반으로 상대방이 아끼는 것을 보는 앞에서 집어 가기도 하고, 몰래 집어 가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상대방이 보는 앞에서 집어 가는 것은 주인이 내키지는 않으나 반승낙을 한 것이라 본다면, 몰래 집어가는 것은 들키면 장난이고 그렇지 않으면 작게는 도둑질이 되고, 크게는 절도가 되는 셈이다.
물건을 잃어버린 측에서는 그 아끼는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속을 태우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보통사람이 하기 힘든 결단을 내린 이야기를 할까 한다.
Y교수는 어느 날 친구 네 사람을 집으로 초청하였다.
초청한 사유는 잘 모르겠으나, 저녁 식사 후 술까지 대접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친구들이 돌아간 후 난실인 베란다에 들어가 보니 그토록 아끼는 중투를 분에서 뽑아가 버리고 없었다.
나는 Y교수의 훔쳐가 버린 중투 얘기를 듣는 도중 국제신문 문화부장으로 있는 소설가 S선생의 명석 탈취 미수 사건이 떠올라 혼자 웃었다.
얘기인 즉, S선생이 한 번은 평소 친히 지내는 선배 집을 방문하였는데, 거실에 진열된 수석 중 수반 위에 연출된 산수경석(山水景石)이 심장이 뛸 정도의 명석이라서 탐이나 죽겠더란 것이다.
그 선배께선 S선생의 신세를 진적도 있기에 몰래 가지고 집을 나서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선배도 그 낌새를 알아 차렸는지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다 선배께서 뒤가 마려워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에 ‘때는 이때다’ 하고는 문제의 수석을 옆구리에 끼고 선 냅다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급히 서둘다 보니, ‘우탕탕!’ 소리가 났는지 대문을 열기도 전에, ‘이 친구야 그것만은 안 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뒤를 닦지도 못하고 바지춤을 움켜쥔 채 맨발로 뛰어 나온 선배에게 목덜미를 잡혀 명석 탈취극은 실패로 끝났다는 얘기였다.
각설하고, 난실 한 켠에 비어있는 난분을 쳐다보는 Y교수는 매우 아쉬운 생각이 심골을 누비는 걸 느끼었다.
그날 친구 네 사람 중 두 사람은 난에 문외한이고, 두 사람은 난을 하는지라 그 소행은 난을 하는 두 사람으로 좁힐 수 있었다.
더 더구나 그 두 사람은 술을 마시던 중 난실인 베란다에서 난을 구경까지 하였으니 말이다.
Y교수는 심한 고민에 빠졌다.
중투를 찾게 되면 친구를 잃게 되고, 친구를 잃지 않으려면 중투를 포기해야 되기 때문이다.
남이 애지중지하는 물건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집어간 소행머리가 가까운 친구지간이라 해도, 더군다나 난을 한다는 사람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계속 친구로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느냐 하는 생각이 울컥울컥 치밀기도 했고, 중투가 얼마나 갖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연민이 가슴에 와 닿기도 하였으나, 아무리 귀한 난이라 할지라도 사람에 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러 친구를 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보니 마음이 담담해지더란 것이다.
Y교수는 그 뒤로 중투는 마음에서만 기르기로 했다고 한다.
물론 고가의 중투를 입수하기가 만만치 않기도 했지만, 난을 사랑하되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난을 오랫동안 길러 가면 모든 것을 관유(寬宥)하며, 기다리는 느긋함을 배운다고 했다. 난 보다도 친구를 택한 Y교수의 선택에서 진정한 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오늘따라 가을 하늘이 더 맑고 높기만 하다.
▶글쓴이: 이성보
-저서 : 「난향이 머무는 곳에도」, 「석향에 취한 오후」, 「난에게 길을 물어」, 「세상인심과 사람의 향기」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