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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충의공 엄흥도와 군위현감 정사종(3)

admin 기자 입력 2020.04.05 21:39 수정 2020.04.05 09:39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세종은 두 세자빈을 폐하고 세 번째 세자빈을 고르는 일에 신중을 기하게 된다. 휘빈김씨, 순빈봉씨를 뽑을 때처럼 명가의 규수 중에서 새 세자빈을 간택하는 쪽보다 후궁 중에서 간택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된다.

〈세종실록 세종18년 12월 28일 기사 중〉 시험해 보지 않은 사람을 새로 얻는 것과 본래부터 궁중에 있으면서 국모 될 심성을 지닌 사람을 뽑아 세우는 것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후회가 없을 것이다.

당시 세자의 후궁 세 명 중 세자 문종의 마음은 승휘홍씨에 기울어 세자빈으로 올리고 싶었지만 이미 딸이 있는 자였기에 다른 후궁들 보다 품계가 더 높은 양원권씨를 세자빈으로 올려야 한다는 세종의 뜻에 따라 권씨를 간택 하게 되었다.

권씨는1418년 안동권씨 화산부원군 권전(權專1371∼1441)과 해주 부부인 최아지(崔阿只)의 딸로 충청도 홍주(충남홍성) 합덕현에서 태어났다. 14세가 되던 1431년 세종(13)의 왕세자였던 문종의 후궁으로 들어와서 종4품 승휘(承徽)에 오른 후 1433 첫째 딸을 낳게 되지만 그 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후 권씨는 종3품 양원(良媛)이 되었고 1435년 (세종17)둘째딸인 경혜공주를 낳았다. 2년 후 <세종19실록>1437년 2월 28일 기록에는 “왕이 근정전에 나아가 양원권씨를 책봉해 왕세자빈을 삼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라고 하였다. 외부에서 세자빈을 간택하는 관례 대신 세자의 후궁 중에서 세자빈을 뽑는 첫 번째 사례가 된 것이다.

1441년 세종(23년) 7월 23일 자선당에서 원손(元孫)인 단종이 태어 났다는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은 기쁨에 겨워 2급 이하의 죄수를 모두 사면하는 대사면 교지를 발표 하는데 이 교지를 다 읽기도 전에 용상 근처의 큰 촛대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세종 역시 안 좋은 예감을 느꼈는지 그 촛대를 치워 버리도록 하였다.

이것이 불행의 전조였는지 결국 다음날 단종의 생모 세자빈 권씨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세종실록에 왕세자빈 권씨가 졸(卒)하였다. 빈은 성품이 단아하고 효행이 있으며 아름다운 덕이 있어 동정(動精)과 위의(威儀)에 모두 예법이 있으므로 양궁(兩宮세종과 문종)의 총애가 두터웠다.

병이 위독하게 되매 세종이 친히 가서 문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더니 죽게 되매 양궁이 매우 슬퍼하여 수라를 폐하였고 궁중에서 모시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세종23년 7월 24일)은 “행실이 안팎에 보인 것은 현(顯), 충화(忠和)하고 순숙(純淑)한 것을 덕(德)이라”한다면서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문종이 1450년 2월 조선의 5대 임금으로 즉위하자 그해 7월 顯德嬪(현덕빈)에서 현덕왕후로 추숭하고 소릉(昭陵)이라는 능호를 내렸다.

세자빈(1418~1441년)권씨는 살아생전 왕비의 지위에 오른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왕비라고 칭할까? 사후에 왕비로 추숭(追崇) 됐기 때문이다. 현덕왕후 소릉은 사후에 더 많은 수난을 당했는데 사육신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모두 극형을 받게 되는데 현덕왕후의 어머니와 동생인 권자신도 함께 능지처참을 당했고 이미 단종이 죄인으로 노산군이 되었으므로 그 어미 된 자도 그냥 둘 수 없다 하여 폐서인 하였다.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는 현덕왕후 능의 수난사 기록에 의하면 “하룻밤에 세조가 꿈을 꾸었는데 현덕왕후가 매우 분노하여”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이려 하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 너는 알아 두어라고 했다 세조가 놀라 일어나니 갑자기 동궁(세조의 장자 의경세자)이 죽었다는 기별이왔다. 실로 약 한 첩 써볼 겨를도 없는 급변이었다.

현덕왕후의 저주라 여긴 세조에 의해 문종과 함께 잠들었던 현릉에서 6년 만에 파헤쳐진 관은 시흥 군자 바닷가 10리 바깥에 버려지는데 1456년의 일이다. 정조 때 이긍익(李肯翊)이 쓴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살펴보자 “밤중에 부인의 울음소리가 바다 가운데서 나더니 차츰 옮겨와 산 아래에서 그쳤다.

스님(농부가 발견 했다고도 함)이 새벽에 그곳을 가보니 옻칠을 한 관이 물가로 떠 내려와 있었다. 스님은 너무도 놀랍고 괴이쩍어 곧 풀을 베어 관을 덮고 바닷가 흙을 덮어 그 자취를 감추게 하였다.

그 뒤 조수에 밀려온 모래가 쌓여 육지가 되었는데 몇 년 안 되어서 풀이 나고 언덕이 되었다” 〈연려실기술 제 4권 문종 조 고사본말〉

지금도 안산(안산시 단원구 능안로)에 가면 관우물터 표지석이 있다. 현덕왕후의 버려진 관이 바닷물에 밀려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렀는데 훗날 이곳이 육지가 된 뒤 우물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관이 닿은 우물터라 하여 관우물이라 이름 하였다고 전해진다.

현덕왕후의 신위는 종묘에서 내치고 무덤인 소릉(昭陵)이 파헤쳐진 것에 대하여 소릉 복위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생육신 중 한사람인 남효온이다. 현덕왕후 소릉은 1456년 단종 복위 사건으로 연루되어 폐위된 지 20년이 지난 1478년 성종 9년 남효온이 25세의 나이로 현덕왕후의 소릉을 복위하자는 상소(上疏)를 올린다.

아직 세조를 도왔던 신하들이 온전히 고위 관직에 있던 시절에 소릉을 복위하자는 것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공신들과 세조의 명분을 직접적으로 부정한다는 뜻 이었다.

철벽같은 권력에 대한 도전이며 누구도 말하지 못한 금기를 들 춘 것이다. 결국 훈구(勳舊)파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 문제를 공론화 하는 계기는 되었다.
연산군 때도 김일손 등 사림 출신 관원들이 현덕왕후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단종의 모친을 복위 하게 되면 세조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이는 정권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연려실기술 기록〉에 의하면 유순정은 현덕왕후 복위에 가장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그날도 조정에서 복위 논쟁으로 한창 설전이 벌어지고 있던 중 갑자기 유순정이 쓰러져 실려 나갔다.

그는 그 길로 병이 심해져서 죽고 말았는데 사람들은 유순정의 죽음을 두고 말하길, 먼저 죽은 정미수(경혜공주의 아들이자 현덕왕후의 외손자)가 유순정을 잡아 간 것이라고 했다.〈연려실기술 제 4권 문종조 고사본말 소릉의 폐위와 복위 편〉

유순정의 졸기를 보면 그에 대한 인물을 알 수 있다. 유순정(柳順汀 1458∼1512)의 자는 지옹 인데 진주 사람이다.

김종직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활을 잘 쏘아 무인 중에서도 비교할 자가 드물었다.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 주모세력인 지중추부사인 박원종, 前(전)이조참판성희안, 이조판서 유순정을 반정 삼대장이라 일컬었다.

유순정은 성격이 우유부단하여 과단성이 없었고 뇌물을 좋아하여 전장을 많이 차지했다.
유순정도 반정 공신으로 장녹수의 집을 하사받아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어떤 손님이 찾아가자 유순정이 말하기를 “무령군(유자광)은 복이 있어 그가 받은 집은 재물이 매우 많아 장독이 30개나 되는데 내가 받은 집은 쓴 듯(빗자루로 쓸어내다)하니 복 있는 사람을 따라 갈 수 없는 것이다”하였으니 그의 비루하고 인색함이 이러했다.

말년에 또 여색이 방탕하여 열(熱)한 약을 먹다가 실명 했으며 천명 되로 살지 못했다.(중종실록 7년 12월 20일 유순정 졸기)

유순정의 졸기를 보면 정난(靖難)이든 반정(反正)이든 공신들의 주체세력들이 노비와 재산을 나누어 가지는 한 부분을 보여준다.

중종 7년(1512)이 되면 현덕왕후 복위가 본격적인 정치현안으로 거론된다.
소세양(蘇世讓1486∼1562 조선중기 문신)도 남효온과 같이 문종이 홀로 종묘에 제향을 받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며 이런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세조의 허물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며 우회적으로 종묘 문종의 배위(配位남편과 아내가 다. 죽었을 때 그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가 없는 것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현덕왕후의 복위는 조정의 여론뿐만 아니라 민심 또한 기울어 대간(臺諫사헌부 사간원의 벼슬)과 시종신(侍從臣조선시대 왕을 가까이서 모시던 신하를 합쳐 부르던 말)들은 한 달이 넘도록 현덕왕후의 복위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그러던 중 1513년 중종(8년) 2월 18일에 종묘에 있는 큰 소나무에 벼락이 떨어지자 복위를 염원하는 민심이 하늘에 닿아 이런 재앙을 일으키게 한 것이라 믿었다.

드디어 소릉은 동원이강릉 형태로 현릉에 다시 천장하게 되었다.
중종실록에 문종과 현덕왕후 능 사이에 소나무 몇 그루가 시야를 막고 있었는데 현덕왕후의 묘를 천장한지 며칠 되지 않아 소나무 한그루가 시커멓게 말라 죽어 버리자 중종이 공인(工人)을 시켜 소나무를 베어내자 마침내 두 능이 막힌대가 없이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이 서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벼락이라는 자연현상을 내세운 것은 역사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다는 계기와 명분으로 현덕왕후의 복위를 바로 잡으려 했던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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