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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오래된 기억

admin 기자 입력 2020.04.05 21:45 수정 2020.04.05 09:45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일 년 중 밤이 제일 긴 달에 늦둥이로 태어났다. 늦둥이 태어난 것이 싫었든지 형제들은 계절을 탓하며 투덜거렸다.

난들 어떡하라고, 삼신할머니가 세상 밖으로 내쫓았기 때문에 쫓겨난 것뿐이다. 기쁨은 주지 못 할지언정 계절을 탓하며 투덜거리면 어쩌란 말인가 하며 대들고 싶었다.

늦둥이는 실권도 없이 그냥 가족의 한 일원일 뿐이었다. 형제들의 따가운 눈총과 무관심 속에서 눈치만 보며 사는 미운 오리 새끼와 같았다.

다행히도 삼신할머니가 나를 세상 밖으로 쫓아낼 때 그냥 내쫓지 않았다.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힘들고 어려운 어떠한 일이 닥쳐도 좌절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설 줄 아는 지혜와 인내심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이것을 삶의 무기로 삼아 여태까지 살아왔다.

나에게 고모 두 분이 계셨다. 큰고모는 우리 집 가까이 살았고 작은고모는 먼 곳에 살았다. 큰고모는 우리 집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자주 오셨다. 형제들은 나를 미운 오리 새끼라고 했어도 고모는 가끔 내 편을 들어 주셨다.

그러면서도 다 큰 녀석이 엄마 젖 먹는다고 꾸짖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다. 때론 어머니에게도 다 큰애한테 젖 먹인다고 하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도 어머니는 듣는 둥 만 둥 하면서 큰 시누이 눈치 보면서 뒤로 돌아앉아 젖을 먹이고 했다. 점차 꾀가 든 나도 고모 눈치를 보며 젖을 먹고 했다. 고모가 좋을 때는 한없이 좋았지만 미울 때는 한없이 미웠다.

송아지는 생후 4~5개월 되면 젖을 뗀다. 어미 소는 울며불며 며칠 동안 송아지를 찾는다. 송아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울어댄다. 나중에는 목이 쉬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모자간의 정을 끊는 비참한 광경에 가슴이 찡해진다. 누구나 한번은 겪었던 일이지만 나 역시 그랬다.

젖을 뗄 때는 순순히 달래가면서 떼는 것이 아니고 물리적으로 뗐다.
어느 날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젖을 먹으려고 했다. 엄마 하얀 젖꼭지가 시꺼멓게 되어 버렸다. 긴 담뱃대에 지푸라기를 넣어 꺼낸 담배 진을 어머니 젖꼭지에 발라 약처럼 써서 먹을 수 없게 했다. 누가 어머니 젖꼭지에 시커멓게 칠했나 하고 떼를 썼다.

옆에 앉아 계시던 큰고모가 “내가 그랬다. 왜, 뭐 잘못했던 것 있나?” 다른 집 애들은 벌써 젖을 다 뗐는데 너는 아직도 엄마 젖을 먹고 있잖아 하시며 야단치셨다. 그 후로는 고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고모가 우리 집에 오면 오지 마, 고모는 못 땠다. 하며 고모에게 대들었다. 어머니는 민망한 듯 나보고 꾸지람하며 못하게 했다.

사람은 이유기 유아기 유년기 등을 거쳐 성년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나가는 동안 삼신할머니가 주신 삶의 지혜로움과 인내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생활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세속에서 일어난 자질구레한 일들을 맛보면서 외세에 적응하며 몸과 마음을 다듬는다. 감정과 행동 그리고 표현으로 자기를 보호하며 사회의 일원이 된다.

따뜻한 어느 봄날 가족끼리 편안한 시간을 가졌다. 벨 소리가 울려 문을 열어보았다. 가끔 전화로 안부만 전해주던 친구가 연락도 없이 미운 일곱 살짜리 와 여섯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왔다. 아직도 우리 집은 고풍을 지키는 편인데 친구네 집은 자유분방한 편이었다.

담소를 나누는 동안 아들 두 녀석이 새로 산 소파 위에 올라가 널뛰듯이 땀을 뻘뻘 흘리며 뛰논다. 아이들 뛰노는 모습에 신경이 쓰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빠, 소파가 찢어졌다.” 하고 큰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질겁하고 찢어진 소파로 눈이 갔다. 친구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녀석들 조용히 앉아서 놀지 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도 여러 가지구나 생각했다.

친구가 돌아간 뒤 소파를 살펴봤다. 보기가 흉할 정도로 찢어졌다.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너를 아껴주는 집으로 가지 하필이면 우리 집에 와서 이런 볼썽사나운 모양으로 해있지.’ 하며 괜히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왔다. 천진난만한 어린 녀석들의 발길에 짓밟혀 견디다 못해 살이 갈기갈기 찢어졌구나.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며 애써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하루는 식구들을 데리고 형님한테 인사드리러 갔다. 방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음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이야기꽃이 한창 필 무렵이 갑자기 마루에서 쇳소리 같은 소리가 쨍쨍 울렸다.

모두가 화들짝 놀라 밖으로 뛰어나왔다. 형수가 일그러진 얼굴로 애들을 어떻게 키웠기에 이 모양이냐? 애들 교육을 단단히 해라. 하며 말끝을 맺었다.

마룻바닥을 살펴보니 애들이 마루에서 장난감 자동차 놀이하면서 왁스로 매끈하게 칠을 해놓은 마룻바닥에 흠집을 내어 버렸다. 애들은 기가 죽어 시무룩한 표정으로 엄마 품에 안겼다.

마음껏 뛰어놀고 싶었던 어린 조카들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려 주지 못한 형수가 원망스러웠다. 하기야 애들을 잘 못 키운 내 잘못도 있겠지만, 어린것들이 뭐 안다고 그렇게 꾸중하는지 알다가도 몰랐다. 어린것들이 이것저것 다 알 것 같았으며 그렇게 하겠느냐 생각했다. 우울한 마음으로 식구들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고모가 밉다고 하며 입에 달고 다녔던 때가 엊그저께 같았다. 나 어렸을 때 줄곧 내 뒤를 따라다니면서 잔소리하시던 고모 생각이 났다. 젖을 오래 먹으면 머리가 둔해서 공부를 잘못한다, 신발을 질질 끌면서 걷지 말라, 운동화를 접쳐서 신지 말라, 밥을 먹을 때면 흘리지 말라, 소리 내지 말고 먹으라 하신 말씀들이 잊히지 않는다.

말씀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더듬어 본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고모님의 덕분이라 생각하며 돌아가신 고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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