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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회색빛 가을

admin 기자 입력 2022.08.31 22:05 수정 2022.08.31 10:05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가을이 익어간다. 후덥지근한 날씨가 사그라들고 폭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아침저녁으론 제법 서늘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던 땀방울이 시원한 바람에 하나둘 떨어진다. 땀 흘리며 지고 가던 지게를 잠시 세우고 팔을 벌려 심호흡한다.

상쾌한 공기가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북적대든 사람들이 떠나고 갈매기도 떠난 텅 빈 백사장에는 주인 잃은 추억들만 켜켜이 쌓여있다.

말복이 지나고 처서가 지났다. 처서가 지나면 땅에서 찬 바람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농작물은 성장을 멈추고 여름내 알알이 맺힌 열매들은 영글게 하느라 분주하다. 매일같이 놀았던 잠자리가 와도 바쁘다는 핑계로 거들떠보지 않는다.

오곡 무르익어가는 풍성한 가을에 희망이 부풀어진다.
깊어가는 가을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빨갛게 익은 과일 등은 새콤달콤한 맛과 향긋한 향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추석 차례상에 오르자면 아직 멀었는데 가을의 전령사인 듯 햅쌀이 시장에서 첫선을 보인다.

질투심 많고 고집이 센 고추랑 참깨 등도 이에 못지않게 겁 없이 밥상머리에 올라앉는다. 뒤따라 땅콩 사과 등 햇과일이 쏟아져 나온다.

땅에서 찬 바람이 나와도 여름 장마는 끝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115년 만에 국지성 장맛비가 수도권과 서울 남부 등지에 500mm 이상의 폭우가 쏟아진다.

갑작스러운 폭우에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줄 모른다. 상가에는 추석 명절을 준비하느라 선물이 가득 차 있다.

식당에도 돼지고기 쇠고기 등 냉장고에 가득하다. 하수구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황토물이 집으로 넘쳐 들어와 선물과 살코기 등을 하나도 못 쓰게 해버렸다.

봉사 대원들과 군 관민이 합동하여 도와주지만 태부족이다. 집과 건물 등은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변해 버렸다.

인명과 재산 피해가 나고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굴리며 망연자실한다.
부유한 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서울 강남도 예외는 없었다. 고급 자동차 등 외제 차들이 넘쳐 들어오는 폭우에 맥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TV에서 본 강남의 물난리를 보면서 어리둥절해하며 의아했다. 인간의 힘으로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이 현실화한 것 같다.

서울의 민낯을 세계에 보여줬다는 것이 수치스럽고 자괴감 마저 든다. 우리나라만큼 치수 사업이 잘되어있는 나라가 없다고 믿고 자부해 왔다.

그런데도 이틀 동안 쏟아지는 장맛비에 물바다가 되었다는 믿기 어려운 상황에 허망한 생각을 지을 수 없다.

가로수가 쓰러지고 교통이 두절되고 범람하는 황토물이 집으로 넘쳐 들어와 사람 앞가슴까지 차오르는 광경을 지켜 보고 아연실색했다. 서울 도심을 끼고 있는 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한 동네가 쑥대밭이 되고 산 밑에 외롭게 사는 한 집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

이삼일 후면 또다시 장마가 온다는 기상청 발표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 진흙탕 속에서 겨우 살아 나온 사람들은 제발 무사히 지나가기를 빌고 또 빌고 한다.

물은 불보다 더 무섭다. 산불로 산이 숯덩이로 변해도 산은 항상 그대로이지만, 폭우로 홍수가 범람하고 토사가 흘러내리면 논과 밭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횅하니 텅 빈 밭을 보고 사람들은 억장이 무너져 아무 말 못 하고 망연자실할 것이다.

단맛 쓴맛을 먹어 본 사람만이 맛을 알 수 있듯이 아픔과 쓰라림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참혹한 고통과 슬픔을 알 수 없다. 오늘과 같이 아찔하고 참담했던 과거사는 나에게도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추석이 가까워져 왔다.

1959년 태풍 사라호가 전국을 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하늘에 밤사이 시커먼 구름 떼가 몰려와 하늘을 뒤덮었다. 어두컴컴한 이른 아침 부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빗물이 방울을 일으키며 수챗구멍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간다. 세찬 빗줄기가 쉴 사이 없이 쏟아지더니 마당에 빗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우리 집은 비가 오면 신경이 쓰인다.
집 뒤에는 낮은 언덕에서 내려오는 작은 도랑이 있고 앞에는 깊은 산골에서 내려오는 큰 도랑이 있다. 홍수가 나면 큰물이 큰 도랑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이 넘쳐 집으로 들어온다. 작은 도랑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도랑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부엌, 광, 방으로 물이 넘쳐 들어오기 때문이다.

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모른다. 앞 도랑물이 황토물로 변하기 시작한다.
점심나절이 되었다. 앞 도랑이 범람하면서 물이 수챗구멍을 통하여 우리 집 마당으로 마구 쫓아 들어온다. 눈 깜짝할 사이 물은 넓은 마당에 가득하다.

장독대가 물에 잠기고 마구간에 물이 들어간다. 소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어찌할 줄 모른다.
장독대에 있던 크고 작은 장독들이 힘없이 물에 붕붕 떠다닌다. 비는 계속 퍼붓는다. 무릎까지 차오른다. 부엌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간다.

부엌에 있는 주방 물건들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 어머니는 큰 장독을 붙들고 허우적대며 안간힘을 다하신다.

앞뒤에서 쏟아져 내리는 홍수로 집은 견디다 못해 쓰러져질 것 같았다. 식구들은 정신없이 뒷산으로 피신했다.

하늘에 가두었던 물이 다 빠졌던지 시커먼 구름 떼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금세 캄캄하던 날씨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한다.

마당에 가득하던 황토물이 빠지고 장독들은 구석에 나뒹굴어져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에 식구들은 망연자실했다.

115년 만에 장맛비에 잠긴 서울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다. 자연은 가만히 있는데 사람이 변해서 자연을 못살게 해서일까, 인간의 한계는 정말로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일까? 이젠, 반가워해야 할 풍성한 가을이 다가올까 봐 겁이 난다. 그럼에도 찾아온 서글픈 회색빛 가을일 망정 따뜻한 정을 나누며 넉넉하고 풍성한 추석이 되면 좋겠다.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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