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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주사 전경 |
ⓒ N군위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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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문턱에 들어선 날, 청화산 자락에 위치한 법주사를 찾았다.
은해사의 말사인 이곳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찰의 고요함이 어우러지는 특별한 곳이다. 그 역사의 흐름을 함께하듯 높은 청마루와 중수한 목조건물이 청화산에 둘러싸여 있다.
법주사는 480년(소지왕2) 심지왕사 또는 은점조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801년(애장왕 2)에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다.
일연 스님이 1289년에 총림을 1292년에는 석조미륵석상과 오층석탑을 조성했다고 한다.
조선 인조 원년(1623)에 법당이 화재로 소실되고 현종 원년(1660)에 다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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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문 |
ⓒ N군위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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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7년(1690)에 보광명전(현 영산전)을 중건하고 정조 24년(1800)에 절을 전체적으로 크게 중수하고 1824년 나한전이 붕괴되어 파손된 상을 서쪽 산에 묻고 나머지를 새롭게 봉안했다고 한다.
법주사 주차장을 지나면 일주문이 맞아준다.
현판에는 ‘청화산법주사’라고 적혀있다. 본당까지 이르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아 일주문을 지나 200여 미터를 가면 3층 규모의 종무소가 있고 그 옆으로 보광루가 보인다. 보광루는 번뇌의 속된 마음을 돌려서 해탈의 세계로 이르게 한다는 ‘불이문’ 역할을 하는 전각이다.
보광명전, 명부전, 영산전, 산신각, 청화선원, 일명당, 욕화당, 화엄실, 보광루, 왕맷돌 보호각 등 법주사에는 많은 전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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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광명전 |
ⓒ N군위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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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군위에서 가장 규모 큰 사찰임이 틀림없다. 옛 외형은 잦은 화재 등으로 상당 부분 소실되고 대부분 근래 중수했으나 1만여 평이 넘었다고 하는 경내 여러 곳의 옛 주춧돌과 거대한 왕맷돌은 과거에도 큰 규모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법주사에는 보물을 비롯해 4개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1985년 법주사 오층석탑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7호(현. 대구시 문화재자료 58호)로 지정됐고, 1995년 왕맷돌이 도 민속문화재 제112호(현. 시 민속문화재 6호)로, 보광명전은 1999년 도 문화재자료(현. 시 문화재자료 70호) 지정됐고 현재는 영사전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그 앞에 위치한 보광명전은 1999년 새로 지어진 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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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맷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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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괘불도’
보물 ‘괘불도’는 2018년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군위군 6개의 보물 중 하나다. 이 괘불은 1714년(숙종 40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수화승 두초를 비롯하여 변철, 치겸, 심안 등 9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만들어졌다.
총 16폭의 비단을 이어 만들어진 10m에 달하는 큰 화면에 보살형 여래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좌우로 벌려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큼직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노사나불 수인을 하였지만 보살의 모습으로 주존을 표현한 점, 화면 하단에 용왕과 용녀를 배치한 독특한 화면 구성 등이 주목받고 있다.
또한, 작품의 담채기법의 색감과 세밀한 필선, 다양한 문양 등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으며, 특히 주존불의 모습은 조선 후기 불화의 새로운 도상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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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층석탑 |
ⓒ N군위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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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문화재 ‘군위 법주사 왕맷돌’
보광명전 앞으로 왕맷돌이 있다. 해맑게 웃는 동자승이 맷돌위에 앉아 있다.
왕맷돌은 위·아랫돌 모두 지름 115㎝, 두께 15.5㎝의 크기로, 국내에서는 가장 큰 맷돌로 알려져 있다.
맷돌이란 정성스레 다듬은 2개의 돌을 아래·위로 포개어 놓고, 위의 돌을 회전시킴으로써 곡물을 갈게 되는 것으로, 윗돌에는 곡물을 집어넣는 구멍이 있고 아랫돌에도 곡물을 잘 갈리게 하기 위한 홈이나 구멍을 두는데, 이 왕맷돌은 모두 4개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300년 전 만든 이 왕맷돌만 보더라도 당시 절의 규모와 많은 스님들이 여기서 수행을 했는지 알 수 있다.
80여 년 전 절 남쪽 200m가량 떨어진 밭두렁에 묻혀 있던 것을 지금의 법주사 자리로 옮겼다. 그때 20여 명이 겨우 옮겼다고 할 만큼 법주사 왕맷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맷돌이다. 원래는 스님들이 기거하던 요사채 가까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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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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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자료 ‘군위 법주사 오층석탑’
석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로 실제 유골이 없는 경우에도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곳으로 여겨진다.
법주사 영산전(옛 보광명전) 앞에 있는 오층 석탑은 고려 시대의 석탑이다.
오층 석탑은 원래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의 몸돌을 올린 모습이었을 것이나, 현재는 위층 기단과 4층 몸돌, 그리고 지붕돌이 없는 상태이다.
탑의 몸은 1층 몸돌보다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 이상의 몸돌은 크기가 거의 줄지 않았다. 1층과 2, 3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특히 1층 남쪽 몸돌면에는 문 모양을 새기고 안에 자물쇠를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또 모서리기둥과 문틀 옆에는 숙종 17년(1690)에 보광명전(지금의 영산전)을 손질하여 고칠 때 새긴 글씨가 남아있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깊이 파였고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가 우아한 곡선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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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광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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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5층만은 몸돌에 기둥 모양을 새기지 않았고, 지붕돌의 곡선도 밋밋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얹어 놓았다.
법주사 오층 석탑은 고려 시대에 세운 탑으로, 일부 석재를 잃어버려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시대 석탑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문화재자료 ‘보광명전’
법주사 보광명전은 법주사의 옛 중심 법당으로 조선 숙종 16년(1690)에 고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영산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77년에 비가 새어서 지붕을 고치기 위해 뜯었을 때 그곳에서 화엄경 80권이 발견됐다.
(현재 은해사 보관) 법당 안에는 현종 1년(1660)에 조성한 목조 아미타 삼존불이 있고, 삼존불의 뒷벽과 옆면 벽에는 강희(1662∼1722)와 건륭(1736∼1795) 시기에 제작된 벽에 거는 불화가 있다.
보광명전의 크기는 앞면이 3칸, 옆면이 3칸이다. 실내는 벽 없이 넓게 사용하고, 바닥은 마루가 깔려있다.
실내 중앙 칸 뒤에는 기둥 2개를 세워 앞에는 불상을 모신 단을 놓았고, 불상 뒤에는 불화가 걸려 있다. 출입문은 네 방향에 나 있는데, 문을 여닫는 방식과 문살의 모양은 위치마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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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괘불도 |
ⓒ N군위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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