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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담수회 선비문화 탐방기

admin 기자 입력 2024.12.06 11:43 수정 2024.12.06 11:43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깊어져 가는 가을 담수회(회장 이종준)원 40여 명은 지난 11월 7일 영주 무량수전 부석사와 소수서원, 선비촌과 무섬마을을 탐방하였다.
안개 자욱하게 낀 이른 새벽 군수님과 관계기관장님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정각에 출발하였다.

오랜만에 집을 나선 기분은 어린아이처럼 설레고 상큼하다. 얇은 선글라스 끼고 창가에 기대어 울긋불긋 익어가는 아름다운 단풍으로 치장한 먼 산을 바라보며 소수서원 찾아가는 길은 흡사 금의환향이나 한 것처럼 화려한 행차길 같았다.

내가 어디쯤 와 있을까? 거울에 비추어본다. 담수회원답지 않게 담수회가 무슨 회인지 페이지를 넘겨 본다.

1963년 10월 10일 공산면 지묘동 달성 서씨(大邱가 貫鄕) 재실에서 영남 지역의 유림 39명이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설립한 회(會)로써, 유학이념과 선비정신을 계승하고, 윤리·도덕 선양과 인재 육성, 전통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이다.

버스가 영주 부석사 앞에 도착하였다. 몇 해 전 이곳을 찾았을 때 길가에 포장 장사들이 빽빽하게 줄지어져 있어 활기가 넘쳐 보였는데 허전했다. 불황이 여기까지 덮쳤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회원님들은 피로한 기색도 없이 70도 가까운 가파른 계단을 열심히 올라간다.

느릿느릿 거북이걸음으로 올라가면서 계단이 몇 개인지 세어보았다. 108계단을 올랐다. 108 번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뜻밖이었다. 몇 해 전 이 계단을 오를 때 헉헉거리며 겨우겨우 올라갔는데 거뜬히 올라갈 수 있었다. 산수 넘는 나이에 새싹이 움트는 희망의 봄소식이 찾아온 것 같아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 생각 저 생각에 무량수전 부석사가 불쑥 나타난 것도 몰랐다. 나무 그늘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다.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 부석사의 본전으로 정면 5칸 옆면 3칸 크기의 목조 건물이다.

지붕은 팔(八) 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기둥은 중간 부위는 불룩하고 아래위로는 좁아지는 배흘림기둥으로 되어있는 것이 자랑거리다.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대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세운 화엄종의 종찰(宗刹)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 의상대사와 선묘 낭자 사이에 일어난 설화가 있다. 의상대사가 자기보다 8살 많은 원효대사를 만나 친교를 맺고 650년 당나라 유학을 결심하고 함께 중국으로 가던 길에 요동 변방에서 고구려 군사에 첩자로 오인되어 잡혔다가 겨우 빠져나왔다.

그 후 661년 의상대사와 원효대사는 해로를 통하여 중국에 가던 중 해가 저물어 어느 묘 옆에서 밤을 새우게 되었다.

원효대사가 깊은 잠결에 목말라 머리맡에 있는 물을 마셨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밤에 마셨던 물이 해골 물인 것을 알고 깨우친 바가 있어 발길을 돌리고 의상혼자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에 들어갔다.

의상대사가 당나라 화엄종의 제2대 조인 지엄(知嚴)대사 밑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있을 때 당나라 처녀 선묘(善妙: 부석사 건립 설화에 등장하는 여인이자 용龍이다)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대사를 짝사랑하며 지내든 선묘 낭자가 의상대사가 공부를 마치고 신라로 갈 때 같이 따라갈 수 없어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어 의상의 귀국 뱃길을 안전하게 지켰다고 한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 의상대사와 선묘 낭자 사이에 일어난 설화가 있다.
설화는 무량수전 서쪽 큰 바위가 아래 바위와 붙어있지 않고 떠 있는 돌이라 해서 ‘뜬 돌’이라는 데서 연유된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 지역의 도적 떼들이 창건을 방해하자 용이 된 선묘 낭자가 큰 바윗돌로 변하여 하늘을 떠다니며 도적들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있다.

바위가 붕 떠 있다고 하여 부석(浮石)이라 하였다, 선묘 낭자에게 제례를 지내는 선묘각이 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각에 맞춰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왔다. 일행을 다 태운 버스는 부리나케 소수서원으로 달린다. 버스 안은 무량수전, 부석사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연세가 모두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계단을 무사히 내려온 것을 보고 놀랐다.

100세 세대에 걸맞게 건강히 사실 것 같았다. 오래오래 사시면서 유학이념과 선비정신을 계승하고, 윤리·도덕 선양과 인재 육성, 전통문화유산을 길이 보존하고 전승하는 것을 후세에 물려주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소수서원에 도착했다. 경렴정 옆 수령 5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우리를 반기고 있다. 은행나무는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부른다.

은행 열매처럼 많은 인재를 배출한다는 뜻으로 서원과 향교에 은행나무가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유교사상과 관련된 조선시대의 정신문화를 간직한 귀중한 문화유산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축계천을 가로지르는 청다리위를 걷는다. 죽계천은 순흥(順興)과 뗄 수 없는 한 많은 사연이 쌓여 있다.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위리안치되어 있을 때였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로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지를 떠돌다가 이곳으로 귀양을 오게 되었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등과 함께 고을의 군사와 향리를 모으면서 경상도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려 단종복위 운동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거사를 단행하기도 전에 기밀이 누설되어 금성대군은 사사(賜死)되고 순흥부사 이보흠은 참살당했다.

그 후 순흥 안 씨들이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안 씨 일족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순흥 안 씨들의 죄 없는 피가 순흥부를 휘감아 흐르는 죽계천을 혈천으로 만들어 십여 리를 더 흘러가 지금의 영주 안정면 동춘리까지 이어져 그 핏줄기가 끝났는 이곳을 ‘피끝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태백산맥 끝이 어디인지 거미줄같이 뻗어있어 버스가 방향을 잃어 길을 헤맸다. 가까스로 무섬마을이 보이는 수도교까지 왔다.

무섬마을은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고풍을 자랑하는 마을이다. 1934년 큰 호우로 마을의 절반이 사라지는 시련도 있었지만, 해방 전까지는 100여 가구가 사는 큰 마을이었다.

1960~1970년대에 주민들이 도시로 떠나가면서 한때는 마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였다. 2000년대에 전통 마을로 지정되면서부터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 마을의 자랑거리는 면적 대비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마을로 독립 유공자 5명이 된다. 조선시대 때 양반과 농민이 함께 공부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운동의 본 기지로 양반과 상민, 남녀노소 구별 없이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아도서숙(亞島書塾)이란 교육기관이 있었다.

땅거미가 슬금슬금 내려앉는다. 섶다리 위를 걸어보고 하루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이 많을수록 여행의 시간은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말을 하고 싶다. 유익한 선현유적지 탐방이 되었으면 좋겠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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