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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로 덮인 남쪽을 향한 마을 ‘남사(南莎)’

경주신문 기자 입력 2007.05.14 14:22 수정 2007.05.14 02:24

경찰서 갔다 온 ‘3층석탑’, 배호의 ‘마지막 잎새’ 노래비

잔디로 덮인 남쪽을 향한 마을 ‘남사(南莎)’

경찰서 갔다 온 ‘3층석탑’, 배호의 ‘마지막 잎새’ 노래비

현곡면 남사1리(南莎一里)
↑↑ 남사저수지
ⓒ 경주신문사


이팝나무에 하얀 쌀밥 같은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밥도 배불리 먹을 수 없던 시절, 초근목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보릿고개를 견딜 때 마치 이밥(쌀밥) 같은 꽃을 피운다고 해서 ‘이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얼마나 배고프고 쌀밥이 그리웠으면 꽃이 쌀밥으로 보였을까? 우리 선조들의 애환이 서린 이팝꽃이 필 때면 모내기가 시작된다.

남사는 구미산 동쪽기슭의 남사저수지 상류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신라시대 효자 손순의 돌 종과 관련한 전설이 얽힌 홍효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마을을 개척할 무렵 이 일대가 황금빛 잔디로 덮여 있었고, 또 마을이 남쪽을 향해 있어 ‘남사(南莎)’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경주에서 현곡을 통해 영천 고경 황수탕으로 넘어가는 927번 지방도를 따라 가다가 말팃재를 넘기 직전에 남사저수지가 있고, 못 위의 산기슭에 펼쳐진 마을이 남사다. 현곡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마을로 북쪽은 영천 고경, 서쪽은 구미산을 사이에 두고 서면 도리, 건천 용명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은 내태리, 남쪽은 가정리와 맞닿아 있다.

↑↑ 삼층석탑
ⓒ 경주신문사

남사는 남사리 삼층석탑과 북삼층석탑이 있는 ‘남사’가 남사1리, 말팃재 아랫마을인 ‘종동’이 남사2리이다.

남사1리는 현재 37가구에 70여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이 마을은 특용작물은 없고 오직 벼농사에만 의존하고 있다. 옛날에는 경주김씨들이 많이 살았으나 지금은 대부분 떠나고 다양한 성씨가 같이 살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마을회관 뒷집에 사는 한원특(90 배반댁)할머니로 출입이 자유롭고 아직 건강하시다.

↑↑ 당목
ⓒ 경주신문사

당나무 장정 4명이 안아도 모자랄 느티나무가 있었으나 60~70년 전에 한 마을주민이 팔아먹었다고 한다. 그 후로 마을이 잘 안된다고 한다. 지금은 그 주변에 있는 고목(말채나무)을 당나무로 섬긴다.

동제 70년대까지는 지냈으나 76년경에 도로가 나면서부터 당나무 숲이 없어지고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





신라시대 대표적인 석탑양식

남사리 삼층석탑(南莎里三層石塔) 남사리 234-2번지. 남사마을 남서쪽 700m 지점의 탑골 안 골짜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다. 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갖춘 이 탑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만들어졌고 몸돌에는 4개의 기둥을 새겼다. 상륜부는 노반만 있고 나머지는 없어져 그 형태를 알 수 없다. 보물 제907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1975년도에 보수하면서 기단석 1개가 없어져 새로 해 넣었다고 한다.

↑↑ 배호노래비
ⓒ 경주신문사

배호의 ‘마지막 잎새’ 노래비 불세출의 가수 배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노래비로 마지막 잎새의 노래말을 지었던 정귀문씨가 이곳에 세웠으면 좋겠다고 원해서 2003년도에 남사저수지 남쪽 언저리에 세웠다고 한다. 정귀문(67)씨는 현곡면 하구3리 출신이다.

남사리가마터 가마골에 있는 도자기 가마터로 ‘장흥고(長興庫)’라는 명문이 새겨진 토기조각을 비롯한 많은 토기조각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곳을 ‘피밭골’, ‘폐밭골’이라 부르고 있다.

↑↑ 북삼층석탑
ⓒ 경주신문사

남사리 북삼층석탑(南莎里北三層石塔)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는 3.9m의 석탑이다. 이 탑은 아래층 지붕돌과 위층 몸돌이 하나로 만들어진 특이한 형태의 탑이다. 기단부와 노반은 새로 만들어 복원하였다. 이 탑은 1973년 경주경찰서 청사를 신축하면서 기단 윗부분을 경찰서 마당에 옮겨 놓았었다. 1985년 경주동부동삼층석탑으로 경상북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주민들의 꾸준한 요청에 의해 1995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하고 명칭도 남사리 북삼층석탑으로 바꾸었다. 석탑의 주변에는 복원하고 남은 탑돌들이 보관되어 있다. 남사마을회관 앞에 있다.

당나라 이여송이 혈 찔러

탑고개 남사 동쪽에서 북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밑에 탑이 있었으므로 ‘탑고개’라고 했다. 본래 장군이 날 자린인데 당나라 이여송이 혈을 찔러 놓았다고 한다. 옛날에 시집 올 때에는 이 고개를 피해 돌아 왔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으로 지방도로가 났다.

가마골 도자기 가마가 있었던 곳으로 새짓골 남쪽에 있다. 지금도 불에 탄 돌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곧은썰매 산등성이가 가파르고 콧등처럼 곧아 나무꾼들이 나무해서 내려올 때 썰매처럼 끌어내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새짓골에 있는 산이다.

구만리봉 남사못 북쪽에 있는 산(345m)으로 내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큰음달 남사의 남쪽 응달진 곳에 있는 산. 소절 진등 남쪽으로 넘어가면 용담정의 대리골이 된다.

명산 남사 동쪽에 주위의 산들과 연결되지 않은 독산으로 ‘맹산’이라고도 부른다.
봇갓등 탑골에 있는 등성이로, 옛날에 탑골보를 만들 때 이 산의 나무를 베어다가 썼다고 한다.

너븐쓸 남사 서쪽에 있는 넓은 등성이. 탑골 안쪽 등성이
속등 탑골 서쪽 안에 있는 등성이 즉 곧은썰매 등성이를 속등이라고도 말한다.
진등 소절과 탑골 사이에 있는 등성이로 긴 등성이를 말한다.
질등재 남사 서남쪽에서 건천읍 용명리로 넘어가는 고개. 새짓골과 뱀이골 사이에 있다.

각종 질병치료에 좋은 약물내기

광짓골 남사 동남쪽의 명산 넘어 있는 넓은 골짜기이다.
논골 탑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논이 있는 골짜기이다.
새막골 둥굼뱅이하고 딱밭들하고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새짓골 탑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곧은썰매 좌우골짜기를 통틀어 ‘새짓골’이라고 한다.
소절 옛날에 작은 절이 있던 남사 남쪽의 골짜기로, 소절이라고도 한다. 주춧돌이 많았으나 캐어 가고 일부가 남아 있다.
큰골 뱀이골 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
탑골 탑이 있는 골짜기로, 남사마을 서쪽에 있는 안 골짜기를 말한다.
땅골 배미골과 질등 사이에 있는 골짜기.
도리채골 골짜기가 돌아 들어가는 골짜기라서 그렇게 불렀다.
약물내기 새짓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약물터가 있었다고 한다.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나는데 풍병 등 각종 병을 낫게 했다. 이 마을 사람들이 그 물을 들어다 먹고 살았다고 한다.

남사저수지에 수몰된 ‘섬짝’

섬짝 대조밭들 북쪽에 있는 들로 양쪽으로 물이 흘러 지형이 마치 섬처럼 되어 있었다. 구만미 아래의 들로 지금은 남사못에 수몰되고 없다. 그 밑에 한들못이라는 못이 있었는데 가정리 일대의 논에 물을 댔다고 한다.
가맛들 가마골에 있는 들로 그릇을 만드는 흙을 팠던 곳이 들이 되어 있다.
광짓골들 광짓골에 있는 들로 산 사이에 들이 형성되어 있다.
대조밭들 옛날 대조(대추)나무가 많았다고 하는 큰골 남쪽의 들이다. 남사저수지에 침수되고 일부만 남아 있다.
뒷논들 마을 뒤에 있는 들로 굴배이 북쪽 뒤에 있다.
딱밭 옛날에 닥나무밭이 있었다고 하는 들이다. 새막골 서쪽에 있다.
말랑밭 남사 남쪽 산 말랑이(꼭대기)에 있는 밭이었는데 지금은 묵혀서 산이 되었다.
명산들 명산 아래에 있던 들이었지만 지금은 남사저수지에 수몰되고 그 일부만 남아 있다.
한들 남사 동북쪽에 있는 큰 들로, 대평(大坪)이라고도 한다. 저수지에 수몰되었다.
황새비미 지형이 마치 황새처럼 생겼다고 하는 논으로, 파래배미 위에 있다. 남사못둑 아래 지점으로 가정과 경계지점에 있다. 지금은 경지정리를 해서 황새지형은 없어졌다.
남사저수지(南莎貯水池) 1954년 5월에 축조된 남사 동쪽에 있는 못이다. 못 아래 약 187정보의 농토가 이 못의 물을 이용하고 있다.
광짓골못 광짓골에 있는 못으로 일제시대에 막았다고 한다.
한들못 한들이 있던 못으로 남사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침수되었다.
탑골못 탑골에 있는 못으로, 옛날부터 있던 못으로 언제 막았는지 모른다.
탑골보 탑골못 밑에 있는 보였는데 20여 년 전에 못을 막아 지금은 탑골아랫못이 되었다.
파래배미 파래(용두레)로 물을 퍼 올려 농사를 지었다고 하는 논으로, 한들 가운데에 있다. 저수지 안쪽에 한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수몰되고 없다.
등굼뱅이 물구덩이를 파서 파래(용두레)로 물을 퍼 올린 곳이다.

배수구 좁아 침수피해 커

이 마을은 간이상수도를 쓰는데 지하수가 고갈되어 물이 잘 안 나오는게 애로사항이라고 한다. 광역상수도가 마을까지 와 있지만 각 가정에는 아직 설치되지 않아 이의 빠른 연결이 요구된다. 취재를 갔을 때에도 마을회관에 물이 나오지 않았다.
남사못의 상류에 인접해 있어 못의 수위와 마을의 개울물의 수위가 같다. 따라서 못에 물이 차거나 비가 많이 오면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원활하게 빠지지 못하고 마을에 고여 마을이 침수되기도 한다. 또 마을을 관통하는 927번 지방도로 아래로 만들어진 배수구가 너무 좁아 물빠짐이 원활하지 못해 비만 오면 물이 찬다.
몇 년 전에 도로를 북돋우면서도 배수구는 그대로 두어 비만 오면 마을주민들이 침수피해에 시달린다고 한다. 취재진이 이 마을을 찾았을 때에는 홍수기가 아닌 데에도 배수구의 상단이 수면과 불과 한 뼘밖에 여유가 없었다. 비가 많이 내리고 또 배수구에 나뭇가지라도 걸려 막히면 마을은 물바다가 될 판이다.
또 이 마을은 구미산자락에 위치해 1974년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사유재산권 행사가 제한되고 있다. 남사2리와 가정리는 얼마 전에 풀렸는데 이 마을만 아직 묶여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형평에도 맞지 않고 국립공원으로 묶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쓸데없는 규제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김영길(65·전 동국대부총장)이 살고 있다.
이 마을에 출신으로는 김동진(43·전 삼성전자)씨가 있다.
농번기를 맞아 바쁜 데에도 불구하고 취재에 적극 협조해주신 윤태수 이장님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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