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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간 택호(宅號)와 농촌생활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07.09.03 13:00 수정 2007.09.03 12:57

사라져간 택호(宅號)와 농촌생활

|독|자|투|고|

사라져간 택호(宅號)와 농촌생활

↑↑ 재부군위군향우회 박종영 총무국장

필자가 유년기와 청년기를 산 산성면 삼산1동(범실하동)마을은 70-80년대 까지만 해도 100호 이상(경주최씨 40%, 김해김씨 40% 각성바지20%) 모여사는 전통적인 농촌 촌락이었다. 농촌 어느 동네든간에 예외가 없겠지만 마을에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넘쳤고 그래서 해마다 봄 가을이면 시집 장가드는 처녀 총각도 많았다.
필자의 “고추친구”들만해도 (남자만) 18명 정도되었고 위아래 연배들도 대동소이했다. 우리 고향 마을은 비록 부농은 아니었지만 늘 생동감이 넘쳐 흘렀고 농번기때면 품앗이가 일상사가 될 정도로 서로 돕고 살아가는 미풍양속이 그림보다도 더 아름다운 농촌이였다.
지금도 지난날의 추억들을 기억하고 싶은 일이라면 착하고 순진무구한 어린시절 봄이면 끝없이 펼쳐진 보리밭 사이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소먹이러 띠 뻘건 산에 오르며 하늘 높이 떠있는 종달새 소리를 수없이 들으면서 기차길 옆 과수원 밭에 능금꽃이 하얗게 핀 풍경과 들판 가득 어우러진 초록의 세상에서 꿈과 희망을 키우면서 한 없이 뛰어놀다가 저녁이면 초롱초롱한 별들을 바라보면서 티없이 맑게 자란 지난 일들을... 겨울이 오면 할머니 옆에 앉아 심청전, 장화홍련전이나 귀신이야기, 전설적인 옛이야기로 겨울밤을 따뜻한 화로 불 옆에서 감자를 구워먹던 추억속에 지난 날들이 지금 어른이 되어서 되새김질 하자면 올해 보다도 잊혀지지 않는 고향(삼산동)에서 성장했던 까가머리 유년시절의 내모습이 아니었나 돌이켜 본다. 당시 동네 아낙네들은 서로를 높여 택호(宅號)를 불렀는데 이는 어느 농촌 동네든간에 이름을 막대놓고 부르지 않던 미풍양속의 유습이 였다고 생각든다. 우리 할머니 “매동”띠, 우리 아버지 “옥계”띠, 대개는 친정동네 이름을 섰다 “띠”라는 말은 “댁(宅)”이 변한 말이었다.
반깥 양반들은 자연 매동양반(어른) 옥계양반(어른) 아니면 어린아이들이 심부름을 갔을 때는 호칭이 “옥계 어르신네요”라고 불렀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름도 못 불리고 산 여성들의 한(恨)스러운 삶이라고 비판도 하지만 기실 그 발원은 “상호존중”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택호를 지어서 부르는 것은 빈부와 지위고하를 묻지않고 한가정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몸소 실천했던 우리 조상님들의 뜻 깊은 따사로운 지혜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나 세상은 늘 그대로 인 것이 없듯이 급속한 이농으로 이제 농촌은 빈집들이 늘어나고 나이 많이드신 노부모님들만 고향 농촌을 지키고 계시니 고향 농촌 풍경도 이제는 을씨년스러워지고 있다.
정겹게 다정하게 부르던 택호도 차츰 그 빛을 잃어가고 있고 이웃과 이웃과의 끈끈한 인정미는 더욱더 멀어져간다.
농촌에서 결혼을 하고도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있으면 좀 늦추어서 택호를 짓고 자남이 아니고 분가를 일찍하게 되면 바로 지어 붙이던 택호. 빌어먹고 살기 위하여 혹은 수몰된 고향을 버려두고 도시로 몰려들면서 사람들은 정겹게 불러 보던 택호도 농촌을 떠나면서 함께 버렸다.
도시생활에서는 택호를 불러 줄, 불릴 이유가 없었던 때문이었을 게다.
아직도 농촌생활을 하고 있었으면 필자에게도 정겨운 택호가 하나 있었을 터인데……
지금은 그 흔한 “박 사장(사장이 아닌데 거북스럽게 들리고)” 아니면 “박 선생(선생이 아닌데 선생님 소리를 들어야 하고)” ○○아빠, “종영”씨. 영 생동감이 잃어버린 단어들인 것 같다.
부르는 사람마다 다 다른 단어들을 사용해야 만 되니 세월의 변화속에서 우리 조상님의 넓으신 아량과 남을 먼저 생각해 주던 예의 바른 지혜로움이 담겨져 있던 미풍양속의 “택호” 이젠 자꾸 사라져만 가니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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