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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해외배낭연수 기행문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07.09.03 13:44 수정 2007.09.03 01:41

공무원 해외배낭연수 기행문

공무원 해외배낭연수 기행문

↑↑ 홍연백 총무과장

군위군 총무과 홍연백 과장(사무관)의 공무원 해외 배낭연수 기행문을 연재키로 했다. 본지는 홍연백 과장의 지난 5월11일부터 20일까지 10일간에 걸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위스 등 4개국 해외 연수보고서를 중심으로 연재, 보도키로 했다.

『여행은 최고의 수업이다』③

<이전호에 이어...>

다음은 고대 로마의 유적지, 포로 로마노(Foro Romano) 현장을 답사했다.
베니치아 광장과 콜로세움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로”라는 뜻은 공공 광장이라는 의미로 또한 “포럼”이라는 말의 어원이 여기에서 생겼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상업, 정치, 종교등의 시민생활에 필요한 기관의 모든 것들이 밀집해 있던 지역이였다.
로마의 중심지로써 로마제국의 발전과 번영 그리고 쇠퇴와 멸망이라고 하는 로마 2500년의 역사의 무대가 되었고, 중심이 되는 곳을 제외한 많은 건물들이 283년에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바실리카 에밀리아와 시저 신전(Templum Caesar), 원로원, 개선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치, 새턴신전, 바실리카 율리아, 베스타신전, 베스타신녀의 집의 흔적, 카스토르와 플룩스 신전, 로물루스의 신전, 콘스탄티누스의 바실리카 시져의 무덤 등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있었다.
↑↑ 개선문


그리고 우리 배낭여행팀 일행은 대형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Colosseum)을 견학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알려진 로마의 상징이며 거대한 원형경기장으로 당시 로마인들의 기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콜로세움 주변은 콜로세움과 포로로마노등의 고대 로마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었다. 네로궁전의 뜰에 있었던 인공연못은 AD 72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80년에 완성된 대형 원형투기장 겸 극장이다. 생사를 겨누는 검투사와 짐승과의 격투가 여기에서 개최되었고(영화 글래디에이트 참고) 80개 정도가 되는 출구에 5만 5,000명의 관객이 입장할 수 있는 경기장이였다. 네로 통치시대를 영화로 한 영화 “쿼바디스”에서는 기독교도의 박해장으로 사용된 콜로세움 장면을 잘 보여준다.
고대 로마 유적지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최대지름 188 m, 최소지름 156 m, 둘레 527m, 높이 57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이다. 콜로세움은 거대하다는 뜻으로 근처에 거대한 네로상이 있어서 이름 지어졌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1층은 토스카나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아치가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 카베아(Cavea)로 불리는 관람석은 5등급으로 구분되며, 사회적 신분에 따라 좌석배치가 달랐다고 한다. 제일 아래층은 대리석 계단으로 원로원 의원들이 앉았고, 신분의 귀천에 따라 층계 재질도 바뀌어 벽돌계단에서 나무계단에 이르기까지 차별화 되었다고 한다. 귀족부터 서민까지 로마 시민이면 누구나 콜로세움에서 거행된 각종행사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낙성식에는 축하연과 각종 행사가 100일간이나 계속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태리 사람들은 그 나라의 가장 유명한 고적은 콜로세움(Colosseum)이며 다른 이름은 “플라비호 원형경기장”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다음은 로마의 트레비분수를 견학했다.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분수 설계 공모전이 이루어졌으며, 이때 당선된 니콜라 살비의 작품이다. 1732년에 착공하여 1762년에 완성되었으며, 분수의 아름다운 배경은 나폴리 궁전의 벽면을 이용한 조각으로 이루어져있다. 로마시대에서 볼 수 있는 바로크 양식의 마지막 걸작품이라고 한다. 분수 중앙에 자리한 해마가 끌어올린 커다란 조개 위의 냅튠신과 트리톤신의 대리석 조각들은 브라치의 작품이다. 이 분수의 물은 ‘처녀의 샘’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전쟁에서 돌아온 목마른 병사에게 한 처녀가 샘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샘을 수원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는
전설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로마로 돌아오길 소원하며 동전을 던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 바티칸 시국

배낭여행 4일차(2007. 5.14 14:30 바티칸시국 방문)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와 유럽의 역사에 중대한 역할을 해온 교황청은 원래 라테란에 소재하여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309부터 1377년까지는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으로 이전되어 있었고, 1377년부터 6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재의 장소인 바티칸에 소재하고 있다고 한다. 로마시가지의 중심에서 북서쪽으로, 테베레강 건너편에 위치한 바티칸 언덕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초대 교회신도들의 묘소가 있던 곳이다. “바티칸”이라는 이름은 고대 이탈리아 반도의 주민인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이 지역을 바티쿠스 언덕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는 예언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바티(Vati)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수세기동안 영광과 또한 고난의 역사를 걸어온 교황청은 1870년 이탈리아가 통일이 됨으로써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다가 1929년 뭇솔리니와 교황 피우스11세 간에 체결된 라테란 조약에 의하여 바티칸 시국(市國)이라는 국명의 독립국가로 승인 받게 되었다.
바티칸의 면적은 0.44㎢(133천평)밖에 되지 않는 소국(小國)이지만, 그 영향력은 전세계 구석구석에 안 미치는 곳이 없을 정도다. 바티칸은 전 세계에 퍼져있는 카톨릭 교회의 총본산이고, 교황은 로마의 대주교이자, 세계 카톨릭 교회의 최고의 사제이다. 그리고 바티칸은 신문사, 방송국 등을 갖고 있으며, 우표와 화폐도 발행한다고 한다. 그리고 “국방”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군복을 입은 스위스 근위대가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513)는 기존의 오래된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운 대성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브라만케에게 대성당 건축 계획을 맡겼다. 이리하여 현재의 성 베드로 대성당(산피에트로 대성당)의 공사가 1,506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성되기까지는 120년이 걸렸고, 광장이 있는 현재의 모습이 될 때까지는 176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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