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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의 유래와 제사상 차림법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08.08.20 16:17 수정 2008.08.20 03:33

(사)충·효·예실천운동본부 부총재 김종오

제사(祭祀)의 유래

우리나라의 제사는 고려부터 신명을 받들어 복을 빌고자 하는 의례로서 자연숭배의 제사 의식이 행하여 졌다.
삼국시대부터 자연신에 대한 제사가 자신의 조상에 대한 제사의례로 발전하였으며 일반 민중보다 왕가에서 먼저 행해졌다. 고려 말에 성리학의 수입과 더불어 “주자가례”에 따라 가묘를 설치하려는 운동이 사대부 사이에서 활발해 졌으나 사실상 가묘가 그다지 보급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불교의례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주가가례”와 같은 유교의례가 사회전반에 쉽게 보급되지 않았다.

16세기 중엽부터 성리학이 심화 되면서 양반 사대부 사회에서 “주자가례”가 정착하게 되고 주자가례에서 명시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오늘 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표시로 행하여지고 있다.

제사음식·제주진설

 
↑↑ 차례상
ⓒ 군위신문 
진설(陳設) 제수진설에도 말이 많다. 오직 해서 「남의 제사에 곶감 놓아라 대추 놓아 라 참견 말라」는 말이 나왔으며, 「깍아 놓아 라 굴러 간다」는 풍자까지 생겼을 정도이다.

대한한 사전(大韓韓辭典)에 조(棗)(대추 조)를 찾아보면 「조동율서(棗東栗西)」라고 되어있으나 예문(禮文)에는 조서 율 차(棗西栗次)라 했을 뿐이다. 퇴계(退溪)는 「어동육서(魚東肉西)로 생동숙서(生東熟西)」와 적유삼종(炙有三種) 어축치(魚縮雉)이며, 어육(魚肉)은 천산(天産)이라 양(陽)이니 기수(奇數)요. 과곡(果穀)은 지산(地産)이라 음(飮)이니 우수(偶數)라 치적(雉炙)은 계적(鷄炙)으로 대용 한다.

진설 요령은 집사자(執事者)의 좌(左)가 서(西)요, 우(右)가 동(東)이다. 따라서 제상의 앞이 남(南)이 되고 뒤가 북(北)이 된다. 남(南)은 제상 앞 중앙에 향탁을 놓고, 그 동(東)편에 주준 상(酒樽床), 서(西)편에 축(祝)탁을 놓는다. 향탁 위에는 후면 중아에 모사를 놓고 그 뒷줄에 합동 로서(盒東爐西)로 향합과 향로를 놓고 주준상 위에는 강신잔반 (江神盞盤), 퇴주그릇 주전자 술병을 놓고, 향탁 앞에 배석(拜席)이며 북면(北面) 중앙에 신위(神位)이다.

제상남단이 제 오행(第五行)으로 실과인데, 생과(生果)가 서(西)편, 조과(造菓)는 동(東)이며, 사행(四行), 이 채(債), 삼행(三行) 탕(湯), 이행(二行)이 적(炙), 일행(一行)이 반갱(飯
羹)이다.

사행(四行)양 끝에 「좌포(左脯) 우혜(右醯), 이행(二行)양끝에는 「좌면(左麵) 우병(右餠), 일행(一行)에는 좌단(左端)으로부터 「시접(匙접) 반(飯) 잔(盞) 갱(羹) 초(醋)」가 되고, 합설 시(合說詩)에는 「반(反) 잔(盞) 갱(羹) 시접(匙접) 반(飯) 잔(盞) 갱(羹)」이 된다.

적(炙)은 어적(魚炙), 육적(肉炙), 육탕(肉湯) 치적(雉炙)이 있는데 치적(雉炙)은 계적(鷄炙)으로 대용하낟.
그리고 탕(湯)은 어탕(魚湯), 채탕(菜湯)이 있는데 제수는 살림 형편과 그 때 그때 사정에 따를 것이지 수량에 궁될 필요 없이 제주의 정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

제사상 진설(陳設)법은 각 지방의 관습에 따라 약간 다른 점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향교에서 권하는 제사상 차리는 법을 많이 따르고 있다. 진설하는 위치를 말할 때는 편의상 제사 지내는 신위를 향하여 우편을 동쪽, 좌편을 서쪽으로 정한다.

북쪽에 병풍을 치고 병풍 앞에 신위를 모실 위패(位牌)와 촛대를 마련한 다음 식어도 괜찮은 음식부터 제물을 차리고 진설이 다되면 미리 써둔 지방을 위패에 붙인다. 제사상 앞 가운데 위치한 향상에는 축문, 향로, 향합을 올려놓으며 그 밑에 모사(茅沙)그릇, 퇴주그릇, 제주(술)등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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