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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정겹고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08.09.03 13:14 수정 2008.09.03 11:46

소보 언실다리의 여름 - 소보면은 자연그대로

군위 소보면 송원2리 오현섭


↑↑ 오현섭 씨
ⓒ 군위신문
벌써 여러 날 저녁 걷기 운동을 했다. 방천 둑을 걸어도 보고 알령(송원) 들녘을 따라 걷기를 한 지도 달포나 되었다. 오늘은 언실 다리 쪽으로 갔다. 알령 들판 사이로 난 농로 길은 한 뼘 굽지도 않고 쭉 뻗은 가르맛길이다. 그 길은 시멘트 포장으로 2Km는 족히 넘는다.

달빛에 하얗게 드러나는 직선 길이 특징이다. 한참을 걸어 달산 마실 길과 마주치면 시원한 밤바람이 이마를 스친다. 길을 꺾어 모롱이 돌아갈 때면 골바람이 얼굴 가득 스치고 등허리가 시원해진다. 아내는 얼른 말을 먼저 한다.“이런 기분에 밤길을 걷는 거지요.” 여름 낮 무더위에 지친 몸에 골바람 감도는 맛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청색 반바지로 시원스레 쭉쭉 걸어 나간다. 마치 경보 선수라도 된 듯 가볍고 사뿐하게 내딛는다. 한 동안 걷기에 몰두해 정적이 감돈다.
↑↑ 알령 들판의 쭉 뻗은 농롱
ⓒ 군위신문
아내는 늘 편안한 얼굴로 잘 웃는다. 맑은 소리도 높고 말끝마다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거리낌 없이 소박하다. 담백한 삶의 표정이 검은 눈동자에 투명하도록 단순해 보인다. 어지러운 감정이나 티끌이 없어 소녀처럼 순수하게 보여 부담스럽지 않다. 잠시 마른 정적에 딴 얘기로 슬쩍 화제를 돌려본다. 그래서 낚시 이야길 끄집어냈다.

“소보에 와서 낚시라도 하고프나 혼자는 심심해서 못하겠다.”
“낚시하면 이제부터는 같이 갈 텐데......”
진심을 담아 코옥 찔러 화답하여 주어 내심 정겹다. 대량리(위성 2리) 입구 큰 다리에 다다른다. 짧지만 세느강의 미라보 다리 못잖은 아름다움이 있어 보인다. 멋진 상상을 하며 달빛에 고즈넉한 마을을 돌아본다. 최근에 새로 지은 산뜻한 집들이 마을 경치를 풍요롭게 하는 것 같다.

마실을 한바퀴 돌아 나오면 언덕과 마주친다. 절벽아래 달빛비친 강물이 은은하게 보인다. 강 건너로 보이는 산 아래로 불빛이 비친다. 이곳에 정자라도 지어 옛 사람의 풍류나 한번 즐겨도 멋들어지겠다. 바위 언덕 아래 물결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건너편 희미하게나마 둥그스레한 산봉우리가 보인다. 아내가 손끝으로 그쪽을 가리킨다.

“저어기 어슴프레 보이는 봉우리를 자세히 보면 엉덩이 같지요. 그게.......호호, 엉덩이 산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부른다나. 어때요. 닮았지 않나요.”
“어디요, 모두가 산봉우린데.......어, 저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봐도 그냥 산봉우리가 연이어져 있을 뿐이다. 아내는 깔깔 거리면면서 구지 엉덩이 산이라고 하며 자기 엉덩이를 툭툭 쳐 보인다.

“언제 밝은 날 한번 자세하게 가르쳐 드려요. 정말 엉덩이 같이 생겨서 오래 전부터 엉덩이 산이라고 불린답니다.” 달빛이 내려앉은 산봉우리가 그렇게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소보 마실 곳곳에는 정겨운 이름을 붙인 자연부락이 참 많다. 그만큼 소보라는 마을은 훈훈한 고향 사람들의 정겨움이 묻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랫 얌대리(내의 1리)를 돌아가니 키 큰 옥수수 대가 길섶 따라 늘어서고 참깨 밭의 싱그러운 풋내음도 코끝에 스친다. 몇 채 외롭게 있는 외딴 집을 지나면 오른 편으로 비닐하우스들이 보인다. 갓 캔 듯한 땅콩의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고향 냄새다. 거름 내음을 맨 먼저 아내는 코끝에서 알아차린다. 이때 동행인이 눈에 벌레 티가 들어갔다고 눈을 비빈다. 내의리 회관에 들러 뒤꼍 수돗가에서 물로 씻고 나니 한결 낫다고 한다. 아내가 하얀 손수건을 내민다. 다시 웃얌대 버스정류장 앞을 지나자 할매들이 길가에 멍석을 깔고 비스듬히 누워 여름밤 피서를 즐긴다. 한마디 던진다.

“시원하세요.”
“글코요. 어디 사시는 양반들인교?”
“소보에 사니더. 운동하러 가지요”
개들이 짖어댄다. 낯선 사람들이 마을 앞을 지난다고 한 놈이 짖자 이집 저집 개들이 덩달아 마구 짖어댄다.

드디어 언실 다리까지 왔다. 마무리 공사가 진행 중이다. 송원에서 예까진 5Km는 족히 되는 듯하다. 좀 쉬어 가려고 다리 난간에 비스듬히 기댔다. 달빛 받은 강물은 은빛으로 길게 띠를 이룬다. 고요함이 가득하다. 황소개구리 우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린다. 그때 한 줄기 강바람이 스치자 시원한 감촉을 느낀다. 이 다리에서 소보 찻집에 전화하면 냉큼 차배달이 된다며 아내는 또 까르르 웃는다. 얇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한껏 웃는다.

“그럼 차 한 잔 시켜 볼까?” 다리 건너편 마실이 언실(내의 3리)이다. 그래서 이 다리도 언실 다리다. 마실 뒤 언덕 위에는 그림 같은 멋진 집이 있다. 불빛이 가장 높게 비치는 집이다. 사진 예술인이 산다고 하는데 그럴 듯한 운치가 어울린다고 하면서 아내는 언제 한번 구경 가자고 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살고 파요’ 노래를 아내는 가만히 읊조린다.

“그래. 언제 꼭 한번 가 보자”노래 속 표현을 이런 곳에 비유해도 지나침 없을 듯 하다. 이마 위로 흐른 땀을 하얀 손수건 내밀어 훔친다. 별빛과 달빛이 물빛에 가득 내려앉는다. 다시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 본다.

“저 달은 뉘 달이고, 저 별은 뉘 별이요.”
낭만적 추억을 별 헤는 밤으로 엮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연륜은 세월 따라 가도 꿈과 낭만은 그대로이면 우리 생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랴! 스스로 위안을 하고 함께 소리 내어 웃어 본다. 한참을 쉬었더니 되 오는 길은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진다. 모롱이를 돌아 나오니 메밀꽃 필 무렵의 단편 소설이 연상된다. 뒤따르는 동이 녀석과 나귀를 몰고 가는 허생원을 연상한다.

비록 메밀꽃은 없지만 달빛이 내린 모롱이 길은 상상하고도 남는다. 한참을 걸었다. 소보 재를 넘는 길이 나타난다. 멀리 차 불빛이 길게 비친다. 아내는 얼른 위험타고 갓길로 손잡아 붙여 세운다. 따쓴 체온이 있다. 다시 엉덩이 산이 나타난다. 아내의 청바지 위로 둥그스름한 엉덩이와 닮아 있어 흠찟 놀란다. 그 때 대량 마실 할매들을 만났다. 지난번 대량리 다리 위에서 사탕 한 알 나눠 주었는데 옥수수 몇 개를 건네준다. 베푼 만큼 돌아오는 나눔의 손길이다. 작은 나눔은 배가되어 다시 돌아온다더니 보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같다. 나눔에 대한 관심은 작은 물결이지만 돌아올 때는 큰 물결로 번져 온다. 공감을 한다며 아내는 배시시 웃는다.

어느 덧 알령 마실 큰 길의 불빛 간판이 쿵짝 쿵짝쿵짝 네 박자로 깜빡거린다. 마실 전체도 네 박자로 연달아 쿵짝거린다. <웰빙 소보> 안내 불빛 옆에 작은 쉼터 정자까지 나온다. 마실을 한번 살펴 보고 다시 걸었다. 신계리 강둑을 지나 이미골 깊숙이 들어가면 바람재가 있다. 예전에는 군위 읍내를 가려면 바람재를 넘어야 했다. 바람재는 바람이 세다고 붙여진 이름이지만 동네 사람들에게는 바람기를 많이 풍긴다는 전설로 이어져 오고 있다. 두 손 잡아 손바닥 치기로 동행한 사람들이 헤어진다. 달빛 내려앉은 언실 다리 걷기의 여름날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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