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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수 교수의 적라(赤羅) 이야기 - 연재(1)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09.03.02 17:39 수정 2009.03.06 02:13

김완수 교수의 적라(赤羅) 이야기 - 연재(1)

※ 필자소개

↑↑ 김완수 교수
ⓒ 군위신문
군위의 고대 역사를 탐하는 향토 사학자 김완수 교수(영남이공대학)의 적라이야기를 본지 325호부터 328호까지 4회에 걸쳐 연재키로 했다.
김완수 교수는 지난 1945년 출생으로 서울의 숭실대학교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섬유기술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김 교수는 유소년시절 선친의 고향인 사직리(못골)에서 지내다가 불로리로 고향을 옮겼으며, 후배인재 육성을 위해 영남이공대학교의 교수직에 있다가 퇴직하였다.
김 교수는 군위의 고대역사를 탐하는 향토 사학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러면서 틈틈이 감성학(感性學)을 공부하고 있다.
한편 김완수 교수는 현재 효령면 불로리 마을에서 상명헌(桑名軒)을 두고 작농(作農)의 꿈을 실천하고 있다.



(1)군위는 ‘적라’이어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에는 그 나라만이 가지는 고유의 독특한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국사(國史)라고 하는데 국사이면서도 또한 동아시아의 지역사(地域史)다. 이렇게 생각의 시각을 바꾸어 보면 국사는 마을마다 가지고 있는 향토사(鄕土史)에 그 뿌리를 두고 성장하였다는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군위읍과 효령에 있었던 2000년 전 마을
ⓒ 군위신문 
우리들 선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70만 년 전인 구석기시대부터 만주와 한반도에서 각각 생활하여 왔으며, 그 후 신석기시대가 되면서 만주지방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태양을 따라 동진(東進)하여 한반도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주과정의 결과로 한반도의 주민들은 계속 교체되었으며 선주민격인 토착민들과의 혼혈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성립한 우리 민족에서 최초의 국가는 BC 2333년에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古朝鮮)이며, 두 번째 나라는 BC 108년에 멸망한 위만조선이 된다. 이후 한반도에는 삼한(마한, 진한, 변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고려, 조선, 대한민국의 순서로 나라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현재 한국고고학계의 시각으로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삼한을 원삼국시대, 또는 초기철기시대 사회라 규정하며, 고고학적으로는 원사시대(原史時代,)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삼한은 고조선과 삼국, 그리고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연결하는 다리와 같은 역사적 실체이다. 따라서 삼한이 만든 역사는 한반도 남부에 있는 고고학적 유물을 발굴, 채집하거나, 또는 중국 등 이웃나라의 역사에 남아있는 자료를 이용하여야 역사적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있었던 군위도 삼한의 진한(辰韓) 땅에 있었으므로 다른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동질(同質)의 사유(思惟)세계와 문화를 가졌을 것이다. 따라서 군위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설화로서도 군위의 올바른 역사를 만들어 세우는데 동반자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 고고학적 자료가 첨가된다면 한층 군위의 역사는 빛날 것이다.

지금까지 군위지방에 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므로 석기시대 사람들이 이 지역 사람들의 직접적인 조상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지석묘와 입석들이 어느 정도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철기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하여 왔을 것이다. 이후 사람의 숫자가 점차 증가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고 마침내 우두머리가 있게 되는 읍락사회로 발전하였다.

서기 1145년 경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잡지, 지리」 숭선군(崇善郡)조에는 이 지방, 군위에 대한 신라 경덕왕의 지명 개정 내용이 들어있다. 즉 모혜(芼兮)현을 효령현으로, 노동멱현[奴同覓縣: 一云 如豆覓, (如臣覓;북한본)]을 군위현으로 개명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동혜현( 同兮縣)에 대하여서는 어느 지역인지 몰라서 고치지 못하고 미상(未詳)으로 남겨 놓았다.

이것은 757년까지 이곳 지역에서 사용하여오던 순수 우리말 지명인 모혜와 노동멱을 두 글자의 한식(漢式) 지명으로 고친 것이다.
우리들은 ‘현재의 군위읍’ 땅을 가리키는 옛 이름인 여두멱과 노동멱에 ‘멱(覓)’이 공통으로 들어있는 사실을 특별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필자는 이 ‘멱(覓)’을 강물(水)과 땅으로 이어지는 취락의 의미보다는 종족(씨족)을 나타내는 뜻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서기전 126년 이후쯤부터 한반도에 정착하였다고 하는 맥족(貊族)을 나타내는 ‘맥’(貊, 맥)이 ‘멱’으로 사음(寫音)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보면 맥족이 즐겨먹던 맥적(貊炙, 너비아니)을 후세에 와서 설야멱(雪夜覓)이라고 한 사실에서 ‘멱’은 맥족을 나타내는 문패(門牌)와 같은 키워드가 된다.

그리고 정철의 ‘관동별곡 본사 2’에 나오는 목멱(木覓)은 서울 남산(목멱산, 몽싼)을 말하는데 이때의 멱은 성(城)과도 그 뜻이 소통될 것이다.
이와 같은 순우리말로 만들어진 고대의 현(縣)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서기전 시기인 서라벌시대부터라고 생각한다.
마을의 이름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살면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고 이러한 이름들은 당시 사람들의 감성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이런 마을 이름을 원초적 지명이라고 하며 이들 지명이 서기 757년 한자로 차자(借字: 음차, 훈차)되면서 점차 오늘날과 같은 지명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고대의 정보가 농축되어 있는 지명에서부터 『군위 이야기』를 출발하려고 한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군위의 역사적 사실을 속살로 하고 여기에 상상(想像)의 날개옷을 걸쳤다.
군위 시민 여러분들의 따뜻한 이해를 기대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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