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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룡과 같은 산, 赤羅 - 연재(3)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09.04.10 17:20 수정 2009.04.10 05:23

향토 사학자 김완수 교수(영남이공대학)의 적라(赤羅) 이야기

↑↑ 김완수 교수
ⓒ 군위신문
1748년에 편찬된 군위현 읍지 ‘적라지(赤羅誌)’에서는 252.1m의 적라산(赤羅山)을 군위의 진산(鎭山)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산은 군위지역에서 제일 높지도 않고, 산세도 그렇게 좋은 편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단지 남천과 위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라는 지리적인 이점 때문인지 여두멱 마을 사람들에게 영산(靈山)으로 추앙 받았을 것이다.

현감 자신이 직접 편찬에 참여한 것으로 생각되는 <적라지>에서는 군위의 옛날 이름을 적라(赤羅)라고 하였다. 그리고 ‘적라’라고 부르게 된 두 가지 이유를 들었는데 첫째는 당시 사람(職者)들의 복장이 붉은(赤)색 비단(羅) 옷이었다는 것과, 두 번째는 마을에 있는 적라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첫 번째 이유인 비단옷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읍호’의 기록에서 더욱 주시할 것은 이들(적라인)이 서라벌시대 탈해이사금 시절(57~80년)부터 그곳에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서기 1세기경이 된다.
그러면 여러 기록에 나타난 적라산의 이름 변화를 살펴보자.
~ 16세기 : 적라산(赤羅山)
17 ~ 18세기: 한적산(韓敵山), 적라산(赤羅山)
19세기 : 한적산(韓赤山)
20세기 ~ 현재: 적라산(赤羅山)

산의 이름이 赤羅(적라) � 韓敵(한적) � 韓赤(한적) � 赤羅(적라)로 바뀌어 온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18세기에는 적라산을 한(韓)(=삼한)의 적(敵)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산 이름을 사용하다가 다시 19세기에 와서는 원수 적(敵)대신에 붉을 赤(적)을 사용하고, 20세기에 와서는 다시 원래의 산 이름인 적라(赤羅)를 회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원수 적(敵)대신에 붉은 赤(적)을 사용한 당시의 사람들은 적라산에 대하여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그때까지 기억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와 같이 韓敵山(한적산)의 이름 속에는 ‘적라’세력을 한(韓; 진한)의 적(敵)으로 보는 시각이 남아 있다. 1533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있는 군위현의 속현(屬縣)인 효령현에 적라와 노동멱이라는 두개의 군(郡)이 있었다는 기록은 적라를 토착세력인 노동멱과는 다른 이질의 집단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라인들의 출신은, 그들의 뿌리는 어디가 될까?

결론적으로 ‘적라’의 사람들은 토착세력인 노동멱 사람들보다 뒤늦게 정착한 다른 부족(씨족)이 될 것임은 틀림없다.
이렇듯 원사시대(原史時代)와 역사시대의 중간쯤에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사람들, 즉 직자들이 적라산에 있었다는 일은 어떤 사실을 의미할까? 읍호에서는 이들 세력이 당시의 삼한사회에서 읍락(邑落)의 귀족계급인 경사(卿士)와 그리고 직인(職人)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적라산 중턱에는 1정보 가량의 장로평지(長老平地)가 남아있으며 그 아래로 무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다. 지금까지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장로평지(長者平地라고도 한다)는 신라시대 무사(싸울아비)들이 주둔하였던 장소라고 한다. 필자는 이 장로(長老)와 무성(武成), 그리고 무사(武士)라는 글자 속에 그들만이 가지는 비밀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장로, 장자라는 명칭은 초기불교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다.
물론 초기불교는 원시불교인데 서기 1세기경에는 우리나라에 이러한 불교가 수입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서기 48년 가락국의 허황후가 김해로 시집올 때 불교를 가지고 왔다고 보아 이 시기를 불교수입 원년으로 삼는 학자도 있다. 어떻든 불교는 기원전부터 대륙과 바닷길을 통하여 한반도로 수입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었다고 보아야한다.

그러면 이 평지(平地)에서 제의(祭儀)를 거행하였던 사람들을 우리는 무사(武士)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다 다른 계급의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기원전후시기의 우리사회는 제정일치로 무당이 왕을 겸직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시기였다. 이러한 무당, 즉 제사장(祭司長)을 巫師(무사)라고 한다. 아마 武士(무사)는 巫師(무사)의 잘못일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어느 시기에 글자(한자)가 바뀐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무사(싸울아비)를 이렇게 巫師(무사)로 바꾸어 읽으면 적라의 역사를 올바르게 볼 수 있다.

먼 뒷날 어느 시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소수가 된 ‘적라’세력들이 보로(甫老)의 왕히길(‘왕의 길’이 변한 말일지도 모른다)을 넘어서 어디론가 사라졌을 것이다. 떠날 때까지 그들의 활동무대는 적라산과 무성리, 한장군의 전설이 남아 있는 한들(大坪)과 병천, 그리고 성령산까지도 포함될 것이다.
지금도 불로리 마애보살(유형문화재 265호)은 그때의 일을 아시는 듯 고고히 내려다보고 계신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이상스럽게도 고로(古老), 보로(甫老), 불로(不老), 노행(老杏, 老梅實), 오로(吾老, 선산 장천)와 같이 ‘老’가 들어있는 마을 이름이 현재도 남아있다. 이런 마을 명칭은 자연스럽게 만들어 붙인 이름이 되겠지만 필자의 뇌리에는 동예(東濊) 하호(下戶)의 지배자(支配者)인 삼노(三老)가 떠올라 혼란스럽기만 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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