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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라(赤羅) 이야기 - 연재(4)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09.05.01 15:25 수정 2009.05.01 03:28

(4)적라국을 정벌하라

※ 필자소개
↑↑ 김완수 교수
ⓒ 군위신문
군위의 고대 역사를 탐하는 향토 사학자 김완수 교수(영남이공대학)의 적라이야기를 본지 325호부터 334호까지 8회에 걸쳐 연재키로 했다.
김완수 교수는 지난 1945년 출생으로 영남대·숭실대학교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섬유기술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김 교수는 유소년시절 선친의 고향인 사직리(목골)에서 지내다가 불로리로 고향을 옮겼으며, 후배인재 육성을 위해 영남이공대학교의 교수직에 있다가 퇴직하였다.
김 교수는 군위의 고대역사를 탐하는 향토 사학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러면서 틈틈이 감성학(感性學)을 공부하고 있다.
한편 김완수 교수는 현재 효령면 불로리 마을에서 상명헌(桑名軒)을 두고 작농(作農)의 꿈을 실천하고 있다.



(4)적라국을 정벌하라

<국내는 평온이 계속하야 민강부국한지라 경덕왕(敬德王)은 인국(隣國)을 정벌할 대계(大計)를 세우고 엇든 날 군신을 집회하고 적라(今 軍威軍에 잇더 나라)를 정벌할 군략(軍  )을 모의한즉 ………, 왕이 드디어 김장군으로서 선봉을 삼아 ……, 그 일족중 굴지(屈指)하는 김운용(金雲龍)외 28명의 호걸을 다러고 적라국 토벌의 도(途)에 취(就)하다 …… 적라를 대파하고, 그 땅을 召文(소문)의 영지로 하니 ……,> 이 글은 미광(微光) 35쪽에 실린 <赤羅(적라)을 征伐(정벌)…> 원문이다.

미광(연세대학교 소장)은 일제치하인 1926년(大正 15年) 의성군 산운면 소재 관서인 산운(山雲)주재소의 일본인 적도교웅(荻島敎雄)이 지역민 20여명과 함께 만든 소문국에 관한 사료집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정사(正史)나 야사(野史)의 글에서 ‘적라’를 나라로 표현한 것은 이 책자가 유일하다. 그러나 잡기(雜記)로 오인될 정도의 어색한 표현과 체제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책자를 들먹이는 것은 혹시나 이글의 저자가 인용하였을 원전(原典)이 어디엔가 남아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에서다. 그만큼 ‘적라’에 관한 역사적 사료가 희귀한 것이다.

현재 남당 박창화선생의 신라사초(新羅史抄)의 역주(譯註)가 인터넷상에서 뜨거운 감자로 대두되고 있다. 이 역주 글에서는 소문국(召文國, BC 128~AD 245.2)의 1대 예왕에서 마지막 22대 묘초(왕)까지의 왕명과 제위기간 등을 밝히고 있다. 물론 경덕(景德)왕과 운모(雲帽)공주의 기록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소문국 사료집 ‘미광’에 나오는 경덕왕(敬德王; 한자가 틀린다)과, 운모 김씨 세력의 존재는 모두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미광의 저자가 서술한 ‘적라’에 대한 기사를 완벽한 허구(fiction)라고는 단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여기서 필자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서기 185년의 사건, 즉 ‘구도(仇道)의 소문국벌(召文國伐)’ 기사를 실제로 인정하면서 이 역사적 사실을 다른 각도로 해석하고자 한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고고학적 유적, 유물에 의하여 소문국의 멸망시기를 서기 185년보다 늦은 3~4세기경으로 설정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러한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구도의 소문국벌(召文國伐)’은 소문국의 국읍인 금성을 침공한 것이 아니고 적라세력의 본거지인 적라산을 정벌한 사실로 이해하고자 한다.

역사학계의 연구결과 소문(조문)국의 김씨세력(집권세력)과 신라의 김씨왕조 세력은 같은 혈연관계라고 보고되어 있다. 따라서 같은 부족(씨족)사이의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희생양으로 적라를 공격하게 된 것이 아닐까. 물론 당시의 적라는 ‘미광’에 의하면 김운룡을 따르는 28명의 장수에 의하여 정복되어 이미 소문국의 강역에 편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설정은 가능하리라 본다.

1748년 군위현감 남태보가 편찬한 「적라지」 ‘읍호’에는 ‘卿士多住此邑在職者… ’라는 구절이 있다. 이 글은 읍락에는 경사(귀족)와 직자(성직자)가 거주하고 왕은 다른 읍락(국읍)에 거주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 뜻을 확대하여 나라가 있었으며 그 나라가 ‘적라국’이라는 확신도 가질 수 없다. 또 혹시 여담국(?)의 다른 이름이 ‘적라국’일지 모른다는 가정도 있을 법하지만 현재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으므로 이 또한 사리에 맞지 않다.

그러나 18세기경 적라산의 산 이름이 ‘한적’산(韓敵山)으로 바뀐 것에서는 바늘 침 같은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적라산 이름에 붉을 적(赤)대신에 원수를 가리키는 적(敵)이 들어가, 본래의 붉은 비단 옷(적라, 赤羅)이라는 뜻이 뒤에 와서 갑자기 한(=삼한)나라의 적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적라산의 비밀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삼국사기』 숭선군(崇善郡)조의 현(縣)가운데 이동혜현(  同兮縣)은 그 위치를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 만약 이 읍락과 ‘적라’와의 관계설정이 가능하다면 ‘적라’와 이동혜현의 읍락으로 구성된 소국(읍차가 다스리는)이 여담국의 부용국(附庸國)일 것이라는 가정도 있을 법하다. 이렇게 조금씩 남아있는 후대의 기록에서 우리들이 진실을 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러나 역사에서 가정(if)이라는 단어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앞으로 이 지역에 대한 전문가의 진전된 연구를 기대한다.

다행히 군위지역 곳곳에는 꽤 많은 수의 고총과 고분, 및 성(城) 들이 남아있다. 이러한 유물(遺物)들을 발굴하고 숨겨진 문헌사료를 조사함으로서 우리들은 이제까지 상상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군위의 역사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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