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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라(赤羅) 이야기 - 연재(5)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09.05.19 19:08 수정 2009.05.19 07:12

(5)적라, 말 타고 왔을까?

(5)적라, 말 타고 왔을까?

↑↑ 김완수 교수
ⓒ 군위신문
산이나 바다 어느 곳이든 간에 길은 통하기 마련이다. 길은 인간이 만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신이 알려주기도 한다.
상고시대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한반도로 가는 길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길은 태양을 따라 이어졌다. 태양의 저쪽에 핀 무지개에서 민족의 색동감성이 만들어졌다.
이런 길을 따라 처음 진한 땅을 찾아온 사람들은 쇠(鐵, 黃金)를 능숙하게 부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인간과 길은 보이지 않는 인연으로 맺어진다.

이제 우리들은 신화와 역사를 만들었던 길을 찾아가 보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혁거세(서기전 69년에), 수로(서기 42년에), 허황옥(서기 48년에), 탈해(서기 57년에)와 알지(서기 65년에)가 그 길을 왔다고 한다.
허황옥과 탈해는 바다를 건너, 혁거세, 수로, 알지는 육로로 왔다. 혁거세가 지나간 길에는 ‘천생산성’의 설화가 전하고 김해와 경주로 흘러간 수로와 알지에게는 혁거세와 같은 이주(移住)신화는 사라지고 말았다.

얼마 전 KBS(2008. 11. 22)에서 신라 문무왕(?~681)의 비문(碑文)을 방영하였다. 경주 사천왕사에 있는 이 능비의 해석에 따라 한국에서 대성(大姓)으로 행세하고 있는 김(金)씨들이 흉노(匈奴, 스키타이, 훈족)의 후손이 된다고 한다.
비문에는 ‘투후제천지륜전칠엽’( 侯祭天之胤傳七葉)과 성한왕(星漢王)이라는 글이 들어있다.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 7대를 전하여 신라의 성한왕이 되었다’는 뜻이다.

흉노 휴도왕(休屠王)과 부인 알지(閼氏)사이에는 일제(日 )와 윤(倫)의 두 아들이 있었다.
태자인 일제의 5대손이 신라로 와서 알지(성한왕)가 되었고 차남 윤의 5대손인 탕(湯)이 김해 구지봉에서 수로왕으로 탄생하였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수로족단이 남하한 길을 추측하면 한강과 낙동강을 따라 김해로 왔을 것이다. 여기서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渭川)으로 빠져 군위 적라산으로 들어온 수로와 같은 세력이 있었다면 그들을 허보옥 족단(적라사람)으로 생각하자.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허황옥(가락국의 허황후)과 오빠 허보옥(장유화상)이 함께 배를 타고 김해로 왔다는 기사는 없다. 장유화상은 허보옥이 김해로 시집오기 이전에 이미 수로와 동행한 사실이 기록에 남아 전한다. 아마 이들은 처음부터 알던 사이로 함께 남하한 동지로 보인다.

서기 43년 경남 김해에 있는 신어산의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銀河寺翠雲樓重修記)에 의하면 수로와 허보옥이 함께 은하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김병모박사에 의하면 보옥과 황옥이 소속된 족단을 허(許)씨라 하고 이 허는 무당, 무사(巫師)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라고 한다.

따라서 적라산에 정착한 허성족(許姓族)은 무사들인 것이다. 이러한 무사들은 전통적인 색깔의 옷을 입는다고 한다. 즉 그들만의 신분을 나타내는 고유의 색깔을 가지는 것인데 이 색깔이 붉은 적색(진홍색)인 강색(絳色)이다. 따라서 적라의 직자(職者)들은 강색 옷을 입고 무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였을 것이다. 이들 적라인들이 이동혜현(  同兮縣, 아직까지 그 위치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의 구성원이 된다면 우리들은 군위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많은 역사가들은 노동멱현과 이동혜현은 서로 다른 곳이라고 비정하고 있으나 유창균교수는 여두멱, 노동멱현, 이동혜현이 모두 같은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이동혜현( 同兮縣)의 위치와 군위읍지 「적라지」에 나타나는 적라사람을 찾아보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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