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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라(赤羅) 이야기 - 연재(7)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09.06.17 10:51 수정 2009.06.17 10:57

군위 최고의 수령, 남태보

↑↑ 김완수 교수
ⓒ 군위신문
조선 영조임금 때 군위현감의 이름은 남태보(1694~1773년)이다.
그는 의령(宜寧)사람으로 자(字)는 숙도(叔燾)라 하고 호(號)는 서산(西山)이다. 아버지 의빈도사(儀賓都事) 근명(近明)과 어머니 전의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태기와 함께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파에 가담하였으며 1735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군위현감(1748. 9~1753. 8) 때는 서당을 세우고 백성을 구휼(救恤)하는 훌륭한 목민관으로 그 명성이 크게 알려졌다. 그가 펴낸 적라지(赤羅誌)에는 현감 자신의 글이 여러 편 실려 있다.

《현악기로 노래하고 글을 숭상함이 무성의 이름에 걸리지 않고 인재를 교육하고 선비를 양성함이 어찌 군위의 이름에 해로우리요.
시와 술은 관리의 길(吏道,이도)이 아니며, 이도의 근본은 농민에게 있다. 백성들의 얼굴에 굶주림의 기색이 역력하고, 길가에는 굶어죽은 해골이 뒹굴고 있다면, 장차 세상 사람들은 이 고을의 목민관을 어떻게 말하겠느냐》
이 글에서도 고을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권장하는 현감의 자애로운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1759년 6월 익산 군수자리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금마(金馬; 익산의 옛 이름)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가를 불렀다고 한다. 훗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광수는 금마별곡 32곡을 만들어 남군수를 찬양하였다고 한다. 이 별곡에서도 백성들이 굶주리자 현감이 봉급을 깨어서 구휼하였다는 글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마을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준 그를 군위의 시민들은 망각의 늪에 던져 버린 것 같다.

현감을 잊지 말아달라는 비석이 소보면의 위성리 마애삼존불이 새겨져있는 암벽 위에 대좌
와 비신과 뚜껑돌이 도톰하게 조각되어 있다. 고풍스런 이수는 아침햇살에 반항하듯 섬뜩함을 가져다주고 비신의 희미한 글자에 석양은 수줍은 듯 비켜가고 있다.
비문은 250여 년의 세월에도 잘 이겨 縣監南侯□□永世不忘碑이란 글자가 음각으로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의 두 글자는 심하게 마멸되어버렸는데 아마 사연이 있으리라.

이름자만 훼손시킨 것으로 보아 남문(南門)의 역사가 파란만장함을 보이고 있다. 그래도 이 정도라도 남았으니 다행이다. 파손된 글자는 ‘泰普’이리라. 현감 남태보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역대 군위현감 중에서 남후(南侯)는 그 분 혼자이기 때문이다.
남태보 그는 조선왕조의 지방수령으로서는 최고의 안목을 가진 뛰어난 역사가였다. 현감으로 있으면서 읍지(邑誌)인 ‘적라지’를 만들었으며 익산군수 시절에는 익산읍지인 ‘금마지’를 만들었다.

적라지는 이제까지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읍지 가운데 내용이나 서술에 있어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또 금마지에서 삼한(마한, 진한, 변한)의 위치를 기술한 것은 그의 탁월한 역사관을 나타낸 것이다.

어찌 오늘의 군위(군과 군민)가 그를 찬양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우리들은 그 분이 남긴 유적을 잘 보살펴서 지금이라도 남후(南侯)의 은공에 보답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덧붙여서 현감이 만든 당시의 적라지는 어디에 있을까. 군위의 보물 1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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