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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라(赤羅) 이야기 - 연재(8)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09.07.19 21:45 수정 2009.07.19 09:52

적라(赤羅) 이야기 - 연재(8)

(8)효령(孝令)에 효령사(孝靈祠)가 있다.

↑↑ 김완수 교수
ⓒ 군위신문
효령 읍락에 적라(赤羅)가 있었다면 그 시기는 1세기쯤이 된다.
서기 505년 지증왕은 이곳을 모혜(芼兮)라 불렀으며, 757년 경덕왕은 효령(孝靈)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선물로 남겨주었다.
이렇게 효령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왕이 지어주셨지만 마을 이름은 세월이 지나면서 자꾸 변하여갔다.

1392년의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孝靈(효령)으로, 1425년 세종 7년「경상도지리지」에서는 孝令으로 쓰였다. 1454년 단종 2년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孝寧과 孝靈을, 1530년 중종 25년에는 孝靈과 孝令을 함께 사용하여 왔다. 요사이는 ‘孝令(효령)’으로 표기하고 있다.
어느 한자를 쓰는 것이 좋을 것인지는 필자로서는 판단하기 힘들지만 ‘孝靈’이라는 옛 이름을 당시의 감성으로 풀어본다.

757년 한자식 이름인 孝靈(효령)으로 바꿀 때까지 ‘모혜’는 이곳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불렀던 지명이었다.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모혜는 신라말(진한어)이었을 것이다.

현재는 효령이라는 지명에 쓰인 ‘령’을 형태지명소라고 한다.
양주동박사는 이 ‘령’을 들(野, 드르)로 해석하고 있으나 도수희교수는 뜻은 없고 단순하게 달(達)이나 돌(突)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지금까지 효령에 남아 전하는 문집 등에서 ‘령’의 쓰임새를 살펴보자.

1881년 5월 김홍두가 쓴 ‘효령사중수상량문’에는 ‘野老口傳射帿之樹(야노구전사후지수)戰場弔孝令之埋僕姑(전장조효령지매복고)’라는 글이 있다. 푸른색의 사후{射候; 활 쏘는 과녁으로 미후(候), 시후(豕候) 등이 있다}를 걸었던 나무와 매복고라는 설화(說話)를 나타낸다. 현재 사후를 걸었던 위치는 장군리 앞의 거수(巨樹) ‘장군리 왕버들(11-12-3-3, 1982년 지정)’이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매복고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필자의 상상력으로는 마복자(磨腹子)라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磨腹子’를 신라에서는 어떻게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말이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후대에 문자화되면서 일어난 해프닝으로 생각한다{자(子)를 일본어에서는 ‘고’로 읽는다}.

이 마복자는 「화랑세기」에서만 전하는 신라에만 있었던 특별한 ‘아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신라에서는 이러한 마복자제도로 병사들을 전장에서 완전하게 결속시킬 수 있었으며 또한 사병화(私兵化)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기 660년 계백장군에게 치욕의 패배를 안겨준 신라화랑들의 무용담은 마복자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아마 모혜(그 당시는 효령이 아니었다)벌의 군사에는 귀족의 ‘아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가운데 질병 등으로 사고로 꽃다운 나이의 마복자가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을 위무하는 굿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효령에 쓰일 ‘령’은 신령(神靈), 조령(祖靈), 원령(怨靈), 사령(死靈), 지령(地靈)의 령과 같이 얼(넋)과 소통되는 글이 된다. 이러한 기도를 정령신앙(精靈信仰)이라고 하는데 우리민족의 원시신앙에 해당된다.

훌륭하게 모혜라는 땅을 기리는 이름으로 사용될 수 있는 글이다. 한 시대의 역사를 잉태하면서 출생한 땅이름이 조선의 유학에 의하여 단숨에 다른 뜻의 글자로 변질된 것이다.

경북 군위군 효령을 본관으로 쓰는 있는 문중에 효령 사공(司空)씨가 있다. 후손 사공희선생에 의하면 시조 사공중상(司空仲常)님이 원(元)나라 과거에 급제한 후, 귀국하여 판의시사(判儀寺事)로 봉직하면서 충숙왕으로부터 효령군(孝靈君)이라는 봉전(封典)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를 생각할 때 고려시대까지 백성은 물론 조정(왕실)에 이르기까지 孝靈(효령)이 가지는 참뜻을 알고 존중하면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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