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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라(赤羅) 이야기 - 연재(8), 하편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09.08.05 12:59 수정 2009.08.05 01:07

(8)효령(孝令)에 효령사(孝靈祠)가 있다.

↑↑ 김완수 교수
ⓒ 군위신문
(하편 계속)
효령 삼정산 정상에는 소담스러운 김유신사(金庾信祠)가 서 있다.
이 사당(祠堂)은 고려 말 충숙왕(재위기간; 1313~1330년. 1332~1339년)때 사공중상(司空仲常)의 상소로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혹자는 건립시기가 1390년(공양왕 2년)이라고 하지만 사공중상이 효령군(孝靈君)이라는 봉전(封典)을 받은 사실을 고려하면 그 시기는 1332년에서 1339년 사이가 될 것이다.

이때는 중국에서는 원(元)나라에서 명(明)나라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가 끝나가고 조선이 탄생하려고 하는 변환기였다. 이러한 시대 환경에서 사당이 지어졌음으로 처음은 김유신사당이라는 이름에서 출발하였다가 얼마 후 자연스럽게 장군의 좌우에 소열(정방)장군과 이무장군이 모셔지고 장군당도 ‘삼장군당’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것이다.
당제(堂祭)는 고려가 망한 뒤인 조선 2대왕 정종 1년이 되는 1399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1561년에 향사(享祀)로서 시작하였지만 이마저도 1874년의 화재로 중단되었다고 한다.

사진은 1881년 5월에 중수(重修)되었던 장군당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장군당제는 처음에는 정월 대보름과 단오절에 관민이 함께 참여하는 효령현(縣)의 큰 행사가 되었으나 나중에는 효령 불로리에 사는 김해김씨 문중의 향사가 되었다.
현재는 효령사(孝靈祠)라 이름하고 이무장군과 김유신장군의 후손들이 5월 단오절 제동서원에서 행사를 치르고 있다.

1881년 군위현감 정재범이 쓴 효령사 중수상량문에는 赤羅古城(적라고성) 淳朴遺氓(순박유맹)이라는 글귀가 들어있다. 여기서 ‘적라고성’은 이 지역 어딘가에 있었던 적라의 성(土城)을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 ‘순박유맹’이란 갈 곳이 없는 멸망한 나라의 백성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여기서 없어진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 문장의 전후로 보아 가락국(가야)보다는 적라가 있었던 나라, 여담국(?)으로 보인다.

이곳 장군 1동을 옛날에는 나실, 나곡(羅室, 羅谷)이라고 불렀다. 나실은 ‘임금님 납시오’(=나오시다)의 납시가 변한 말이라고 한다. 납시의 ‘ㅂ’이 탈락된 ‘나시’를 ‘나실’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왕이 왔었다는 뜻이다.

서기 660년 백제정벌군의 총사령관 태종무열왕(김춘추)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능한 일이다. 또 태자 법민(문무왕)도 이 시기에 함께 출정하였음으로 무성리 장로평지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에 법민을 나타내는 ‘무’(武)가 들어 가야할 이유가 된다. 그러니까 김춘추가 이끄는 5만(?)군사의 일부가 이곳 장로평지에 주둔하였다는 것이다. 이곳 무성리에는 옛날 장로평지에 신라군사가 주둔하였다는 설화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어떻든 효령사 앞에 펼쳐진 ‘효령벌’은 삼국통일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머물렀던 두 명의 신라왕,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이 조령(祖靈)에게 간절히 기도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신라에서 지금까지의 성골(聖骨)왕 시대를 끝내고 처음으로 진골(眞骨)출신으로 왕이 된 김춘추, 새로운 진골왕조를 개창한 그로써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당시의 글로 모혜와 효령이 가지는 뜻은 모르지만 孝令보다는 孝靈으로 쓰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孝靈이라는 글자는 1250년 이상의 길고도 큰 역사를 나타내는 글이다.
최초의 통일된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이곳에 도착한 신라의 29대 태종무열왕과 30대 문무왕은 부자(父子)이기 이전에 군신의 관계였다. 그들이 함께 한 효령 장군동은 효(孝)를 실천하기 위한 약속의 땅(靈)이었다. 경주 대릉원의 고분보다 높은 삼정산의 정점에 효령사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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