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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적라지’, 군위의 선사시대를 말하다.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09.08.21 10:12 수정 2009.08.21 10:21

9)‘적라지’, 군위의 선사시대를 말하다.

9)‘적라지’, 군위의 선사시대를 말하다.

↑↑ 김완수 교수
ⓒ 군위신문
‘적라지(赤羅誌)’는 18세기 중엽 지현(知縣) 남태보가 찬(撰)한 군위(軍威) 읍지(邑誌)이다. 이 ‘적라지’에서 특히 우리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권 1, 첫머리의 ‘읍호(邑號)’ 기록이다.

⑴읍호 원문
邑號《奴同覓 赤羅 昔?林①爲國都②時 卿士③多住此邑④ 在職者⑤服絳?袍⑥ 百姓⑦異其衣色之別 有羅衣赤兮之謠⑧ 縣名此云 或云境內⑨有赤羅山 故名云 軍威》,

⑵읍호 해설
《옛날 신라의 수도(국읍)를 계림이라고 부를 때의 일이다.
‘노동멱’이라는 마을에는 다수의 경사와 ‘강자포’를 입은 (소수의) 직자가 살고 있었다. 이곳 사람(백성)들은 자신들과 직자들의 옷 색깔이 다른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또 그들 직자들은) “빨간 비단옷…”이라는 노래도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적라’라고 하였다. 혹은 마을 (경계) 안에 적라산이 (들어 와)있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적라’로 불렀다고 한다. (어느 쪽이 옳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든 ‘적라’라는 지명은 옛날 군위를 가리키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⑶원문의 주석
①?林(계림)
『삼국사기』에 의하면 탈해이사금 시절(서기 65년) 김알지가 시림에서 탄생한 것을 기념하여 계림을 국호로 삼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에서는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BC 53~?)이 계정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계림국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들 기록에서 필자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뢰하여 적라인의 적라산 이주시기를 1세기 중반쯤이라고 추정한다.

②國都(국도)
여기서 국도는 소국의 주읍(主邑)인 서울, 즉 국읍(國邑)을 가리킨다. 진한(辰韓)연맹체에는 12개의 소국이 있었다고 하며 어떤 나라에서는 국읍의 이름이 소국명칭으로 통용되기도 하였다.

③卿士(경사)
부여의 제가(諸加)와 같은 관직으로 각 부족의 우두머리(족장, 추장)를 말한다. 이들 경사들의 주거지는 현재의 군위읍 정리(우정골, 좌정골, 흰재)라고 생각한다.

④邑(읍)
삼한의 취락집단에는 큰 규모의 읍(邑)과 작은 규모의 락(落)이 있다. 이 노동멱현(읍)에는 경사와 직자가 있었다는 읍호 내용으로 보아 제정분리(祭政分離)사회일 것이다.

⑤職者(직자)
하일식씨(신라집권관료제연구, 혜안, 2006년)의 지적과 같이 『삼국사기』에서는 유독 신라에서만 관등을 직(職)으로 나타내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없었던 이러한 직(職)은 특별한 관등에 있는 사람이 수행하는 직사(職事)였다.

당시의 남태보현감이 어떤 사료를 보고 내린 결론인가 의아하지만 적라지에서의 직자를 신라시대의 직사와 같은 직으로 인식하고 있는듯하다. 그래서 필자는 직자를 무사(巫師, 師巫, 巫堂)로 설정한다. 왜냐하면 진한에서 특별한 기능을 가진 독립체로는 무사계급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라산에는 소도(蘇塗)가 있었다.

중국역사에서 무사계급은 양사오문화전기(BC 5000~3000년)부터 존재하였으므로 우리나라 진한에서도 이러한 전문계급이 기원전 시기부터 있었다.

⑥絳?袍(강자포)
이 포(袍)는 붉은 빛이 나는 진홍색 비단으로 만든 두루마기와 같은 겉옷이다. 이 옷에 들여진 물감 색을 강색(絳色)이라고 하는데 삼한시대에서는 오직 꼭두서니(?草, 染絳草:日本) 뿌리를 사용하여야만 얻을 수 있는 비색(秘色)이었다. 또 강자포는 직자 고유(固有)의 옷으로 강색은 직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색이었다.

⑦백성(百姓)
백성은 노동멱[기원전에는 여두멱(=여담)이었다]사람들을 말한다. 읍호가 조선시대의 기록이므로 진한 사회를 정확히 표현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마을에는 경사와 직자와 백성들이 섞여 살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⑧적라요(羅衣赤兮之謠)
의식에 사용되었던 적라요, ‘빨간 비단옷’(羅衣赤) 노래와 직자들의 옷에서 유래된 땅 이름이 지금까지 화석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들은 삼한시대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소도(蘇塗)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불렀을 가사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⑨경내(境內=疆域)
적라지의 읍호에서 ‘적라’가 군위의 옛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별호(別號)라는 명칭에는 찬성할 수 없다.
읍호에서는 적라산을 경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의 적라 땅은 적라산 밖의 땅도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읍호에서의 ‘경내’는 나라의 영토(경계)를 나타내는 강역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상 적라지 권 1(卷之一)의 읍호에 나와 있는 경사, 직자, 강자포, 나의적(羅衣赤)이라는 단어를 모두 모아서 생각할 때 기원전후시기 군위의 진산(鎭山)은 적라산이 되며 이곳에서 무사(巫師)들이 활동한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도 적라산 아래 마을, 군위읍 무성리 사람들은 장로(장자)평지에 주둔하였다는 신라시대 무사(武士)들의 설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구전으로 전승되어온 이러한 신라시대 武士(무사)이야기는 분명히 기원전후시기 이 지역에 있었던 巫師(무사)의 오기(誤記)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적라지에서 전하고 있는 군위의 고대사를 우리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지금까지 삼한시대 역사, 특히 진한 소국에 대하여서는 아직까지 미완(未完)의 역사로 남아있다.
이렇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삼한시대가 우리나라에서는 선사시대에 속하기 때문에 역사기록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사서에 남아있는 짧은 기록을 인용하여 삼한 소국의 역사를 설명하여왔다.

두 번째는 삼한의 유물과 유적이 충분하게 발굴되지 못한 환경에서 더 이상 고고학 연구가 진전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역사현실에서 우리는 조선시대의 읍지 ‘적라지’를 다시 평가해 보아야한다.
지금 이 시각에도 몇몇 역사학자는 우리의 건국신화를 재해석하여 역사적 사실로 변환시키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패러다임에서 향토사의 성격을 가지는 읍지라도 고대사를 밝히는 유익한 정보가 될 수 있다면 군위역사를 위하여 마땅히 검토되어야 한다.

또한 편찬자인 현감 남태보의 역사인식이 매우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다. 즉 현감이 익산 군수로 있을 때 편찬한 읍지 금마지(金馬志)에서 마한(馬韓)흥폐고사를 읽으면 현감의 곧바른 역사관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장해빈(張海濱; 1575~1657년, 절강 장씨 시조, 군위읍 대북리 소재)의 약사약보(略史略譜)에 남후지지 군위현감보장(南候之誌 軍威縣監報狀, 1754년)이 있다. 남 현감의 임기가 1753년 8월에 끝나므로 보장은 그 다음해에 작성된 것이다. 조정에 올리는 문서였으므로 아마 상세하게 읍호의 내력을 설명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군위읍지 ‘적라지’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읍지 중 최고의 읍지라는 찬사를 쏟아내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도 읍호기록 하나만으로 충분하게 군위의 보물 1호가 될 것이다. 이 글 속에는 군위의 선사시대를 알리는 귀중한 역사가 담겨있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 책의 내용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크게 염려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적라인 홍승(洪昇)의 지(誌; 1676년)를 저본(底本)으로 하였으며, 여기에 현감이 빠진 부분을 직접 채집하여 보완 편집한 것이다.
만일 앞으로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물, 유적이 이 지역에서 발굴될 수 있다면 군위의 고대사는 새롭게 써야 한다. 나아가 한국고대사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여기에 군위읍지 ‘적라지’의 실체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의 ‘적라 이야기 1편’을 마칩니다.
그동안 열심히 고대 군위의 풍경을 그려보았습니다. 행여나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역사적 오류를 범하지 않았을까하고 가슴 졸이며 많은 밤을 보냈습니다. 많은 지적과 질책도 있었습니다. 아울러 여러 어른들의 성원도 있었습니다. 더욱 발전하겠습니다.
군위의 역사와 문화를 탐색하려고 ‘赤羅文化硏究所’를 不老里 桑名軒에 두었습니다. 많은 도움 주십시오.
김 완 수(011-509-5914) ; wasok @hanmail. 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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