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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향우소식

4·19 혁명 50주년 군위출신 3명 건국포장 받아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10.05.20 14:41 수정 2010.05.20 02:42

경북대 이준영(55학번)· 김길식(56학번)·박헌열(57학번)

4·19혁명 50주년 기념식이 지난달 19일 대구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기념행사에는 4·19민주혁명 대구경북연합지부, 2·28기념사업회 회원, 시민, 학생, 관계자 등 1천200여명이 참석했으며, 혁명 당시 주도적 역할을 한 대구·경북의 공로자 14명(생존자 7명)에 대한 건국포장 수여가 있었다.
ⓒ 군위신문

생존자 7명중 이준영(경북대 55학번), 김길식(경북대 56학번), 박헌열(경북대 57학번)씨 등 3명이 군위출신이다.
정부로부터 50년 만에 건국포장을 받은 김길식 등은 감회가 새롭다며 그 당시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길식, 이준영씨등 3명 만나
이들은 기념행사 하루 전날인 18일 오후 대구시 수성구 범어네거리 복림빌딩 6층 사무실에서 만났다.

대구지역 4·19혁명을 주도한 당시 경북대 문리대 학생회장이었던 김길식씨(74)를 비롯해 이준영씨(76·당시 경북대 철학과 4학년) 등 3명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옛 기억을 더듬으며 4·19 혁명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들은 4·19혁명 50주년을 맞아 건국포장을 받게 됐다.
이들은 1960년 3월15일 이승만 대통령이 12년간 지속된 장기집권체제를 연장하고,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에 이기붕씨를 당선시키기 위해 대규모 부정행위를 저지른 점을 거론하면서 다시 한번 격분했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경제사정이 바닥이었을 때 정치마저 국민들을 실망시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학생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앞날을 예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길식씨는 “마산에 이어 서울에서 시작됐던 대학생 시위는 전국으로 크게 확산됐다”며 “그 당시는 최루탄에 희생된 김주열 열사 사망 등을 신문이 정확하게 보도하면서 모든 국민들이 일어났다. 대구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선언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경찰을 피해 다녔던 일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1960년 4월16일 그는 문리대 화학과 건물 앞 잔디밭에서 학생들을 모았다.
경북대 문리대 학생회장이었던 김길식씨는 3·15 부정선거 및 자유당 독재 규탄 시위를 하기 위해 동료들과 의기투합했고, 18일 선언문과 현수막 등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19일 오후 1시 교정에 모인 1천여 명의 학생들에게 시위 참여 권유 연설을 펼친 뒤, 시위대를 이끌고 교문을 나서 당시 시내에 있던 경북도청 앞 등지에서 ‘독재타도’·‘부정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경북대 철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준영씨는 “그때 반월당에는 시위에 참여한 학생과 시민들로 넘쳐났다”고 회상한 뒤 “학생 시위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음료수 등 먹을 것을 건내주면서 독려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4·19 혁명 유공자들은 한목소리로 혁명의 이념이 퇴색되고 있는 점을 아쉬워했다. 이준영씨는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후 갑자기 지역 사회가 무질서하게 변했다”면서 “하지만 학생들이 스스로 나서서 계몽 및 선도활동을 펼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학생들이 아니면, 부정부패를 막을 수가 없을 정도로 당시는 혼란스러웠다. 4·19 혁명의 순수성을 후대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길식씨는 애국심 뿐만 아니라 남다른 애향심으로 후배들 교육에 써달라며 군위군교육발전위원회에 500만원을 선뜻 내놓기도 해 귀감이 되기도 했다.
올해 김길식씨는 건국포장 수훈에 이어 정부로 부터 국가유공자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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