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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격은 6·25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10.06.18 11:19 수정 2010.06.18 11:23

내가 격은 6·25

↑↑ 김종오 부총재
ⓒ 군위신문
“신 대한 국방군을 뽑는다는 이 소식
손꼽아 기다리던 이소식이 꿈인가
한 글자 쓰는 자여 두 글자 쓰는 자여
나라님께 병정 되기 지원 합니다“

이 가사(歌詞)는 아마도 건국이후 국방군을 창군하며 지원병들에게 애국심을 주입하려는 군가였던 것 같았다.
지금 6.25를 회상해 보니 그때 우리 어린이들이 흥겹게 불렀던 가사가 머리에 떠올랐다. (가사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또래가 비슷한 유유들이 어울려 밤이면 주위 아저씨들로부터 즐겁게 배우고 불렀다.

그 이듬해(1950년) 부터 공산당이 우리 지방에도 극성을 부리기 시작 한 것 같았다.
그날 밤도 마루 밑에서 숨을 죽이고 숨어 있는데 우리 집 바로 옆 작은집에서는 “동무 어디 갔어?”라는 소리와 함께 마루에 여러 사람이 오르내리는 투닥투닥 하는 소리가 들렸었고, 아침이 되어 앞 솔밭에 방위군들의 총소리를 듣고 마루 밑에서 밖으로 나와 숨을 돌리며 어머니는 아침밥 준비하러 샘(우물)에 물을 기르러 가고 나는 누나와 사랑방에 편찮으신 할아버지가 어떠하신지 다녀왔다.

이렇게 하루가 시작되어 밤이면 젊은 청년들은 피신하기 때문에 그 좋아 하던 군가도 배우지 못하고 또 밤만 되면 겁이 나서 마루 밑에 숨어야 했다.
아마 그 해 초봄 인 것 같았다. 밤이면 지방 빨갱이들이 활개를 치며 집집마다 침입하여 젊은 사람들을 잡아가고 그들이 말하는 반동분자들은 비참하게 죽이고 야전에 사용할 이불, 옷가지, 쌀 등을 약탈해갔다.

우리 집에는 할아버지 병세가 위독하신 것을 알았는지 들어오지 않았으나 옆집도 털리고 윗동네에 사시는 숙부님은 며칠을 숨어 지내다가 모처럼 집에 들어와서 자는데 빨갱이들이 들어오는 느낌을 알아채고 “저놈 잡아라” 하는 소리를 뒤로 한 채 뒷집 담을 후다닥 넘어 도망가서 피할 수 있었단다. 이런 일은 자고나면 흔히 들리는 일이었다.

당시 나는 의흥국민학교 매성분교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우리 담임선생님(손00)도 잡혀가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말을 듣고 더욱 소름이 끼쳤다. 밤이 되면 청년들은 짚달미(볏짚) 밑에 땅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숨어 지내는 (비밀)생활을 하였다.

항시 불안과 겁에 질려 지내는 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빈소 방을 차려놓고 삭망(朔望)은 올렸으나 밤이 무서운 분위기였는데 그해 7월경이었을 것이다.
왠지 전쟁 났다는 소문과 피난민들이 밀려오는데 말씨가 경사(서울말)를 써서 어른들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서울에서 피난 가는 중이라 했다. 그 당시는 TV, 라디오, 신문 등 정보 매체가 없어 사람이 직접 전하는 것이 유일한 정보였다.

점차 신작로(국도)에 밀려오는 사람도 많아지면서 나중에는 군인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어느 날 군용 스리쿼터 차에 군인들이타고 마을에 들어와 길이 좁아서 차를 돌릴 수가 없어 고생하는데 마침 아버지가 우리 군(郡)에서 유일하게 일본에서 배운 운전 전문가였다.

군인들의 부탁으로 아버지가 차를 후진하여 어려운 길을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으며 군인들이 몇 번이고 절을 하며 고마워했다. 나도 아버지가 운전 하시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 후 우리 마을도 피난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우리 집은 앞 감나무 밭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중요한 서적과 물건들을 그 안에 묻고, 가족들이 흩어져도 먹을 것 (비상식량)을 대비하여 미숫가루에 생엿 토막을 섞어 각자 한 봉지씩 등에 매고 피난길에 나섰다.

할머니를 비롯하여 우리가족들은 정든 집을 뒤로하고 많은 피난민들과 함께 걷기 시작하여 화수동을 지나 신녕면 갑팃재에 이르니 골짜기에 천막이 있었다.

대부분의 매성사람들은 여기에 다모여 기거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천막 밑에 몰려 있다 보니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아이들은 그 자리에 용변을 보는 지경 이었다.

어머니는 비행기에서 투하하는 폭탄소리에 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어느 날 우리 모자는 집을 보기위해 마을 쪽으로 모험을 무릅쓰고 신작로를 걸어가는데 마을 가까이 와서 헌병들이 길을 막으며 통제 하여 신작로는 걸을 수가 없어 고태(지명)앞에서 검동골 방향으로 해서 조림산 쪽으로 가다보니 저녁때가 되었다.

때마침 같은 마을 매산댁 일행을 만나서 저녁 한 끼를 얻어먹고 조림산 8부 능선을 따라 넘어지고 미끄러지면서 700고지 험준한 산을 밤새도록 걸어 화정동이란 마을을 지나 갑팃재에 도착했다.

조림산에는 아직 전쟁이 없었고 짐승도 없어 다행이었다.
이제 또 피난 방향이 하양 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와촌면을 지나 신대동이라는 마을 어느 빈집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동 도중에 신령을 지나면서 처음 기차를 보았는데 긴 열차위에 사람들이 빽빽 하게 실려 가는 것을 보고 원래 기차는 저런가보다 하였는데 어른들이 아이구! 기차위에 사람들이 탔다고 놀라는 것을 보고 피난민 인줄 알았다. 들리는 말이 기차위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도 많다는 말을 들으니 기차소리만 들어도 겁이 났다. 다행히 신대동은 기차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영천과 다부동쪽에 전투기 소리와 폭탄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피난 중에 신기하게도 호주기(제트기) 프란체스카 여사가 오스트리아 사람이라고 해서 호주(오스트레일리아)와 혼돈해 어른들은 이승만 박사 처가나라 비행기라고 했다. 비행기가 얼마나 빠른지 슁~슁~ 하는 소리에 쳐다보면 비행기는 이미 저산 너머 가는 것이 신기했는데 저산 넘어서 폭탄이 떨어져 “펑” “펑”하며 폭발하는 등 공습이 계속되었다. 들리는 말에 그 공군력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 하였단다.

또 방향이 화산, 조림산 일대인 것으로 보아 우리 마을지역이라 생각되니 더욱 신경이 쓰이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어린 시절이라 총알 껍데기 등을 호기심에 주워 모으기도 하였다. 이때 청년들이 징병으로 입대하며 부르던 군가(軍歌)도 머리에 떠올랐다.

“1절”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까마귀 우는 곳에 저는 갑니다.
삼팔선을 돌파하여 태극기를 날리고
죽어서 백골이나 돌아오리다.
“2절”
아내요 새 세상에 굳세게 사세요
당신과 만날 적에 백년 살자고
지금은 이별가를 합창하고 있으니
꽃 같은 우리 아내 언제나 보리“

이런 징병가(歌)는 마을에서 울음바다로 흔히 볼 수 있었으며 우리 어린이들도 즐겨 불렀다. 이렇게 약 2개월간을 피난 생활하다가 돌아와 보니 우리 집은 대문채와 아래채가 타버렸고 위채는 반파되어 부엌과 방한 칸만을 사용 할 수 있었다.

할머니와 막내 삼촌은 건너편 새집 아랫방에 거주하시고 우리 집은 면적이 넓어 마을에 군부대가 주둔(대대급)하였는데 대대 본부 취사장이 배치되었다.
군인들은 밤이면 야간 전투에 나가고 다음날 보면 전사자가 발생하는 등 아마 그 당시 적군들이 북으로 후퇴하면서 최후 발악을 한 모양이었다.

한번은 의흥쪽으로 가던 미군 차가 독짓덤 모리(커브길)를 지나가다 숨어있던 인민군에게 습격당해 미군들이 로프에 묶여 한 줄로 산으로 끌려가 총살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인민군은 총알을 아끼려고 여러 명을 한 줄로 세워두고 몇 방으로 사살하였으며 어떨 때는 죽창을 사용하기도 했다.

나는 어렸지만 군인들이 작전회의 때 “우리 마을은 앞, 뒤 솔밭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지형”인데 옆에서 보면서 들으니 적군이 높은 고지 각씨산(옥녀봉)쪽에서 내려와 앞, 뒤 솔밭에서 마을을 공격해오면 아군은 마을에서 빠져나와 그 뒤편 계곡(밍골 도랑과 절골 도랑)으로 역습한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을 보고 어린 생각에 군인아저씨들 참 머리가 좋다고 느꼈다.

어느 날은 군인들이 소총 격발 하는 것을 보고 방에 들어가서 취사병들의 소총(99식)을 잡고 나도 본대로 실탄이 장전 되어 있는 것을 모르고 격발해보니 ‘펑’하며 총알이 천정을 뚫고 나갔다. 나는 놀라 도망가고 그 바람에 해당 병사가 기합(氣合)을 받게 되어 아버지가 사정하여 진정된 일도 있었다.

그 후 군이 철수하고 마을 앞, 뒤 인근 산에는 적·아군 할 것 없이 시체가 즐비한 것을 보고 전쟁의 참상을 실감 하게 되었다. 또 적 탱크는 공중 폭격을 피하기 위해 과수원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집 앞 감나무 밭에서 지뢰 폭발로 다쳐서 대구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가셨다.
이렇게 전쟁 통에 목숨 건 피난살이는 어려웠고 이제 먹고살 의·식·주가 문제였다. 당장 식량이 없어서 집집마다 부녀자들은 새벽같이 깊은 산으로 가서 하루 종일 나물을 캐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어두 캄캄할 때 돌아와 식구들에게 나물죽을 쑤어 연명하게 했다. 이렇게 하루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웠으며 그 지긋지긋한 보릿고개를 슬픈 운명으로 넘어온 어린 나날들...

생필품은 주로 비누 수건 의복 등 외국에서 도와준 구호품과 일부 건축자재 등이 보급되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얼마 전에 지진 피해를 입은 ‘아이티’ 와 ‘칠레’ 등을 도와준다니 우리나라가 도움을 받은데서 도와주는 나라가 되었다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듬해 봄 학교에 등교하였으나 교실이 없어 개천가 자갈밭에 가마니를 깔고 수개월간 공부하였으며 그 후 지호동 입구에 동부국민학교라는 신축 흙 막사를 지어 노천은 면했으나 어려운 분위기에 국민학교(초등)를 졸업하고 6km 거리의 읍내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역시 교실이 없어 광풍로라는 벽이 없는 향교마루에서 공부하였다.

이재 마을 어른들도 학생들 편에 배달되는 신문을 보게 되었다. 하교 때는 서울에서 보급된 신문을 찾아 마을에 전했다. 이 신문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정보라인이었다.

신문은 서울에서 3~4일전에 발송되어 보급소에서 하루가 지나 5일~일주일 만에 볼 수 있는데도 마을에 오면 어른들이 “오늘신문에 뭐가났노? 세상 좀 조용해 진다더냐?”는 등 TV 기자회견으로 바로 알 수 있는 오늘날과 비교 되는 세상이었다.

휴전이 되고 어느 날에는 마을에서 서울 다녀오는 사람이 학고가다(상자형) 라디오 하나갖고 와서 그 집 앞에 높이 10m가 넘는 감나무 꼭대기에 안테나를 설치하고 마당에 수십 명의 마을주민들이 라디오 구경과 새소식 을 들으려 모였는데 마침 밤 9시 정각에 라디오에서 ‘땡’ 하는 소리에 그중 한 두 명이 손목시계를 보면서 “내 시계는 5분인 데“ 또 한 사람은 “아직 5분전이다”라고 말하니 서울 갔다 온 사람이 “5분 빠른 것이 맞다”고 했다. “왜? 왜?” 하며 물어보니 “서울에서 ‘땡’하면 여기까지 전파가 오는데 5분 정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 이란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런 60여 년 전의 웃지 못 할 시절 이었다. -끝-

부록#
우리는 지금 애국(愛國)하고 있는가?
한번쯤 깊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6,25를 맞아 부르던 노래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에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처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6.25전쟁 60주년을 맞는 지금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은 못 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부모도 선생님도 군대도 공무원들도 잊어버렸는데 누가 가르쳤겠는가. 그러니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헷갈려 은인(恩人)과 원수(怨讐)를 분간 못하는 것이다.
이래서 한국전쟁을 ‘잊어버린 전쟁’ 이라고 하는 것이다.
잊어버릴 것을 잊어야지 잊어도 괜찮을 것을 잊어야지.
잊을 수 없는 것이 60년 전 6.25전쟁이다.

※참고 사항
6.25전쟁에 참가한 UN 군들의 전사자는 54,000여명 부상자는 10만이 넘었다.
이중에 미군장성들의 아들은 모두142명, 그중35명이 전사했다. 이 덕분에 우리 대한민국이 살았다.

(사)충·효·예실천운동본부
부총재 김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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