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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전 우리나라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10.11.03 11:25 수정 2010.11.03 11:35

6·25 전쟁 60년 맞는 해 “유엔공원묘지를 다녀온 소회(所懷)”

↑↑ 황성창 씨
ⓒ 군위신문
올해 10월 24일은 유엔이 창설된지 제65회 기념일이자 북한 김일성 집단의 남침야욕으로 인한 6.25 한국전쟁 발발로 7,000만 민족이 지금도 가슴에 아물지 않은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온 세월이 60년째 되는 날이였다.

60년전 우리나라의 실상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물음을 찾아 우리가 살아왔던 어둡고 굴곡졌던 뒤안길을 한번 되돌아 보기로 했다.

우선 60년전에는 한국이란 나라는 지구촌에 있는 크고 작은 국가들로부터 아시아 어느 변방의 나라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싶다.

세계 최강대국들의 승전도움으로 우리나라가 독립국가란 타이틀만 겨우 받고 돌아설 즈음에 6.25전쟁이 발발했으니 그야말로 칠흙같은 한밤중에 속수무책으로 난리를 당하고 있는데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참전선언과 유엔의 발빠른 안보리 결의로 한국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전혀 들어본적도 보지도 못했던 한국과 한국사람들의 자유와 평화, 재산과 생명을 북한 남침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미국과 유엔군의 젊은 병사들이 국가와 국경을 초월하여 한국전(1950.6.25~1953.7.27)에 참전했다.

전사한 전몰 장병중 2,300위의 영령을 안장한 유엔기념공원에는 가을하늘 아래 코스모스와 들국화가 차가운 대지에 고운깃 떨구며 초연하고 여유게 피어있다.
세월이 멈춘 곳 말없는 초원에 영면한 유엔군 전몰장병 영령을 추모 참배하기 위해 성역화된 유엔공원묘지를 찾았다.

이곳 유엔공원묘지는 부산시 남구 대연동 779번지에 144,900㎡(약44,000평) 규모로 조성된 재한유엔기념공원으로 1951. 1. 18 한국전에 참전했던 유엔군 전사자 매장을 위하여 유엔군 사령부가 조성하고 한국이 토지를 유엔에 영구히 기증하면서 성지로 지정할 것을 건의 유엔군 전몰 용사들의 영혼의 안식처로 1955년 12.15일 묘지를 유엔이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유엔총회에서 결의문 재977호로 채택하고 유엔과 한국은 이곳을 세계유일의 유엔묘지로 지정하는 협정을 1959. 11. 6일 체결하고 1974. 2. 16 유엔에서 한국전쟁 참전국중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11개국으로 구성된 재한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로 위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잇다.

2007. 10. 24 한국 근대문화제 제359호로 등록관리된 이후부터 육국 제53사단 병력이 경계근무하고 있는 성역화된 세계 유일한 유엔기념공원으로 유엔군 전몰장병의 영령을 안장하기에 이른 경위를 다시 알게되었다. (참고자료 : 재한유엔기념공원 관리처 제공)

유엔공원묘지에 안장된 영령은 6.25한국전 발생직후 유엔에서 안보리 1,2차 결의문 채택과 미국의 해리S.트루먼 대통령이 한국군에 대한 원조와 지원을 명령함으로서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어 미국을 비롯하여 캐나다, 콜롬비아, 영국, 필리핀, 에디오피아, 뉴질랜드 등 6대주 지구촌 21개국에서 전투부대 파견국이나 의료지원국으로 자유세계 진영의 젊은이들이 지형이나 환경과 기후가 생소한 한국전에 참전하여 참전했다. 1950. 9. 28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전투에, 1950. 11. 28일에는 눈덮인 산야에서 파도처럼 밀려드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유명한 장진호전투(1950.11.26~12.13)를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전투라고” 보도했을만큼 악전고투한 전투였다.

우리 국군과 미군 10만명, 그리고 격전지 전투에 뒤섞인 민간 피난민 10만여명을 철수시킨 흥남대철수작전 (1950.12.14~12.24)은 비록 전사에는 길이 빛날 전투작전이었으나 엄청난 피해가 따랐다.

그후 1951. 1. 4일 중공군에 의해 서울이 재점령 당하는 일진일퇴가 반복되는 수많은 전투로 희생된 전사자 중에서 1951~1954년 사이에는 유엔묘지에 21개국 유엔군 전사자 11,000여명의 유해가 봉안되기도 했으나 필리핀 등 7개국 용사의 유해 전부와 미국을 비롯한 유해의 일부가 그들의 조국으로 이장되어 현재는 이곳 유엔묘지에 안장되기를 희망한 11개국 2,300위의 피와 눈물로 가슴을 태운 젊은 영혼이 잠든 검은묘비에 서산에 걸린 잿빛은 가을햇살 잔잔히 흐르고 바람소리가 마치 먼곳에서 부르는 흐느낌같이 들릴 듯 말 듯하다. (참고자료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유엔묘지에 안장된 영령들의 참전 당시의 연령이 사자후(獅子吼)를 토할 기상(氣像)의 17세~24세의 나이였다고 하니 그 안타까운 한의 통곡이 산천을 헤매다 그들의 영혼이 안장된 묘역에 찬바람이라도 스며들까 깨끗하고 말쑥하게 조경한 회양목과 무궁화로 아담하게 단장하고 맞은편에는 경계수림으로 구골나무와 가이즈카 향나무가 잘 어울어져 그속에서 흘러나온 향기는 영혼이 내뿜는 호흡같다.

정성스러운 수목관리와 환경미화가 수려하여 유엔묘지를 찾는 모든 참배객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외형적 관리상태는 만족스러워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유엔묘지를 관리하는 모든 관리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오늘따라 많은 외국인 참배객이 서산으로 기우는 가을 산산한 햇살도 잊은채 이승과 저승길을 잇는 고리로 묘비를 더듬고 여러 추모시설을 눈으로 확인하고 어루만지는 것을 보니 필시 전사자의 부모형제이거나 고국에서 온 친구가 분명하리라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속이 저려온다.

또 주묘역과 추모시설이 있는 녹지 사이에 도은트 수로(水路)라 이름지어진 긴 수로가 있는데 수로를 만들게 된 사연이 너무 슬퍼 내 뼈속까지 아팠다.

유엔묘지에 안장된 전사장 중에 최연소자(당시 17세)인 호주병사 J.P.도은트 성(姓)을 따
서 도은트 수로(Dant water way)라고 지었다는데 삶(녹지)과 죽음(묘지)사이의 경계라는 뜻이 담겨있다는 안내자의 설명을 들은 후 추모관에서 상영되는 영상비디오에서 도은트 병사의 어머니가 “여기에 누운 모든 병사에게는 그들의 어머니가 있습니다”라는 눈물의 메시지를 들을때 이곳에 안장된 모든 영령들의 어머니가 피를 쏟아내는 단장(斷腸)의 절규가 나의 가슴에 꽂혔다.

삶과 죽음의 수로를 지나 조금 떨어진 동편쪽에 높이 2m 폭 1m 크기의 검은 대리석 140개의 입석벽면에 유엔군 전몰 장병 추모명비에는 한국 전쟁중 전사한 40,896명의 유엔군 전사자 이름 하나하나 새긴 추모 조형물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추모하는 마음을 영혼에 바치면서 묵상에 잠시 잠기기도 했다.
추모시설 중심부에 유엔군 위령탑이 있고 탑의 휘호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필이란것도 알게 되었다.

6.25전쟁때 풍전등화 같은 위기를 미국의 젊은이와 유엔군 병사들이 숭고한 인류애의 정신으로 남의 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고귀한 생명마저 희생한 용사들의 영령을 안장한 세계 유일의 유엔공원묘지로 조성한 성역을 이승만 전대통령이 1958년 방문, 윤보선 전대통령도 1961년 방문하였으며 박정희 전대통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때와 1965년~66년 대통령으로서 2년연속 방문했다.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시절에는 수시로 이곳을 방문 참배한 기록이 있었고 이명박대통령도 2010. 6. 18일 방문하여 기념식수도 하였다.

우리나라 대통령중 네분은 유엔공원묘지를 방문 전몰한 병사들의 희생정신을 잊지 않고 그 영혼에 진정한 추모의 마음을 표시한 장한 대통령으로 생각하는데 지금까지 유엔묘지를 방문하지 않은 전직 대통령 다섯분에 대해서는 대다수의 우리 국민이나 당시 한국전에 참전했던 21개국의 국가와 국민들 특히 전사자 유가족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까 생각하니 부끄럼이 앞섰다.

고인이 되셨지만 특히 노무현 전대통령은 처음 미국 방문했을때 “미군의 참전이 없었더라면 나는 북한의 강제수용소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기자들에게 한 것이 당시 매스컴을 통해서 되었다.

그렇다면 생전에 한번쯤은 유엔묘지를 방문 참배했어야 했는데 대통령으로서의 자세는 아주 실망스럽다.

반면에 한국전쟁중에 미워커 8군사령관의 아들 샘워커 중위가 전사하고(1950년) 밴플리트 8군사령관의 아들 지미가 조종사로 출격중 실종되었으며(1952년) 미국 CIA부장의 아들 델레스2세도 미 프린스턴 대학생으로 1952년 한국전에 참전중 총상을 입고 영구적인 정신장애자가 되었다고 한다.

또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셀렌도드 아이젠하워도 장교로 참전했으며 미국의 희망으로 생각하는 인재들의 산실 하버드대 재학생 17명이 한국전에 참전하여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이름이 하버드대학 교내 예배당벽에 동판으로 새겨져 추모하고 있다. 미국 상류층 인사와 그 가족들이 자국의 영토보존을 위한 방어전쟁도 아닌 가난한 나라 한국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은 그 희생정신에 우리는 지금 어떻게 보은의 길을 찾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1953년 휴전당시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의 최빈국으로 냉전속에 절대빈곤과 질병이 만연된 폐허의 땅을 보고 당시 외신들은 “쓰레기더미와 진흙탕에서는 장미꽃이 피지 않는다”고 했다.

절망속에서 탄식만 하던 60년전의 대한민국이 2010년 지금 국민소득 약 20,000달러가 되었으니 300배나 상승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나라이고 국민이다.

대한민국이 선택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부르짖을 수 있는 국토를 지켜주고 받쳐준 것은 우리 스스로가 국토방위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미국을 위시한 21개국의 참전 유엔병사들이 목숨을 던져 한국의 영토를 수호해준 하늘같은 은혜를 받았기에 우리가 선진민주공화국을 가능하게 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선진국으로 번영 도약하여 마침내 다음달에는 (2010.11.11~12일) G20서울정상회의(주요 20개국)를 개최 주도할 국가로 능력있는 선진국 반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보아 한점 부끄럼없는 일등국가의 국민으로서 6.25한국전에 도와준 참전국들에게 보은의 도리를 다했다고 자부하고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가 과거 어려운 국난에 조건없이 지원해준 참전 당사국들이 곤경에 직면했을 때 우리도 아무런 이의없이 국회에서 여, 야가 흔쾌히 거국적으로 지원했던 모습을 보인 일은 있었든지 또 제65회 유엔의 날을 맞이하여 재한 유엔기념공원묘지에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추모하고 참배의식에 참여하였는지 우리 모두가 다시한번 성찰해 보는 기회를 갖도록 제안한다.

2010. 10. 25
부산 군위농산 황성창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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