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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매성리 각시산(玉女峰)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11.01.17 14:29 수정 2011.01.17 02:31

내고향 매성리 각시산(玉女峰)

오늘은 2011년 신정(新正)이다.

이제 내 나이도 고희(古稀)에 접어들면서 옛날 생각이 썰물처럼 밀려온다.
고희라면 “예로부터 나이 일흔 살기가 드물다”는 의미로 요즘은 듣기 거북하게 느껴지는 용어로서 희수(稀壽)또는 칠순(七旬)이라 하고, 칠십칠세는 희수(喜壽), 팔십세는 산수(傘壽)라고 부른다.

어느새 노인들의 전유(專有)어를 쓰게 된 늙은이가 되었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옛 추억이 자꾸 떠오르고… 내 고향 매성리의 상징이기도한 각시산(玉女峰)이 눈에 밟힌다.

우리 마을은 이 명산아래 웃 매성(上梅) 아래 매성(下梅)으로 아래 웃 동내 두 마을이 오손 도손 정답게 구성 되어 있는 전형적인 촌락 이다.

그래서 “옥녀봉전금곡동”(玉女峰前金谷洞)이라 했다. 상매에는 주로 김해 김 씨·김해 허 씨·전주 이씨·인동 장 씨 성 등 80여 호가. 하매에는 경주 김씨 성의 집성촌이 주를 이루는 50여 호가 살았다. 지금은 많이 축소되었지만 옛날에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각시산은 어여쁜 각시의 머리모양 같다하여 각시산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해발 600m의 모양도 아름다운 각시산은 마을을 보호해주는 수호신이기도 했다.

산중턱에서 솟아나는 약수터의 정수된 물은, 요즈음 마을의 특이한 수원지로서 식수를 공급해 주고 있다.

이산을 중심으로 주위 야산을 이용하여 소의 풀을 먹이는 등 가축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또 땔감 나무를 채취 하는 산지(産地)이기도 했다.

각시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의흥, 고로, 산성, 부계, 우보면과 영천군의 화산, 갑팃재, 멀리 팔공산 이 보이는 등 전망이 좋다.

옛날 어린 시절 소 먹이는 일을 생각하면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여름철 오후에 제일 먼저 소를 몰고 앞 솔밭에 나온 사람이 “소 먹이러 가~저~”라고 마을을 향해 몇 번 육성으로 크게 외치는 소리에 윗 못, 아래 못 등 여기 저기 서 소를 몰고 모여 각시산 아래 웃 절골이나 아랫 절골 또는 시끼양지 등을 향해간다.

소는 이까리(소 모는 줄)를 목에 감아 풀 먹으러 올려 보내고(放牧) 다래끼에 담아온 감자를 모지(감자 익혀 먹기) 한다. 감자 익히는 방법은 자갈밭에 돌을 모아 나무를 받쳐 여기에 불을 부처 돌을 달구어 감자를 묻어두고 그사이 소꼴을 한 다래끼씩 베어 오면 다 익어 있었다.
비록 굽는 법은 원시적이었지만 그 맛은 별미였다.

이렇게 즐기다가 해가 지면은 각자 소를 찾아 몰고 집으로 가는데 만약 소(牛)배가 부르지 않으면 어른 들게 꾸중을 듣기 때문에 주위 못(저수지)에 가서 억지로 물을 먹여 배를 부르게 하여 가기도 하는 등 웃지 못 할 일들이 많았다.

지금은 고향에 가보면 추억의 명소인 각시산 주위의 산은 수목으로 우겨져 있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시골에도 건강관리를 위해 산 중턱 재(잿 만대기)에 이르기까지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어 농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등산 하는 모습 들을 볼 수 있었다.

또 옥녀봉은 공식적인 지방 등산코스로서 군에서 관리하게 되어 앞으로 많은 산악인들의 발길이 잦아 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고향 마을에는 주민들이 많이 줄어들어 옛날의 50%수준이다. 농작물 영농방법도 경운기, 탈곡기 등 기계화 되어 소를 이용하여 경작하던 옛날의 농촌 생활상은 하나의 이야기 꺼리가 되었다.

인력도 젊은 사람들이 드물어 노년층으로 바뀌었다. 이 또한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감수해야 할 몫인 것 같다.

새해에는 모두가 토끼처럼 밝고 맑은 눈으로 알차고 실속 있는 설계를 세우고 건강하고 활기차게 모든 일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정신과 지난 것을 뒤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희망과 기대 속에 신묘년을 맞이하며 다시 한 번 각시산을 회상해 본다.

(사)충·효·예실천운동본부 : 부 총 재 김 종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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