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인물 독자마당

세월과 풍경사이 “화본역”

군위신문 기자 입력 2012.03.19 13:23 수정 2012.03.19 01:25

↑↑ 황성창 씨
ⓒ 군위신문
겨울 끝자락에 매달린 추위가 짜릿하고 매섭다. 지난주에 기차의 기적소리가 뜸한 화본역을 찾아 나섰다.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 차갑고 하늘은 낮게 낀 구름색이 먹빛같이 충충하다. 아침 일찍 부산을 출발하여 영천을 경유 신령~의흥~산성으로 가는 길은 자동차를 이용한 여행길이었다.

의흥을 지나 산성면 경계지 부터는 구불구불한 산길이었다. 옛길 그대로라 시선을 간질이는 추억의 눈 맛이 즐겁다. 마음이 저절로 미끄러져가는 느낌, 들뜨는 기분이다. 차창 앞으로 툭 터진 겨울 풍광 한적한 가슴이 시원하다. 아름다운 즐거움도 잠시다. 목적지 화본에는 오전 10시 반경 도착했다.

화본이란 마을 이름은 산여화근고화본(山如花根故花本)이라 마을 동쪽의 조림산 형상이 마치 꽃 뿌리와 같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유래되고 있다.
500년의 긴 세월 속에 흔적과 전설을 담고 있는 아늑한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서 옛집들 길 따라 가다 조금 들어간 위치에 화본역이 있다. 동쪽을 향해 서 있는 화본역은 망구(望九)가 훌쩍 지난 세월에도 환하게 웃는 얼굴이다. 아담하고 깨끗한 역사가 앙증맞게 보인다.

고풍스러울 것으로 상상했는데 뜻밖이다. 반듯한 모습이 앞으로도 수 백 년은 견딜만한 당찬 자세다. 영화 세트장 같은 산뜻한 색감이다. 역 광장을 들어서니 입구 왼쪽에 수령이 백년도 됨직한 버드나무가 당산목(堂山木)처럼 화본역을 지키고 있다. 거목에 속을 텅 비우고 등 터진 나뭇가지 사이로 횟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보인다. 역사를 중심으로 광장 좌우에 히말라야시다 나무가 헐벗은 채 휘몰이 찬바람에 떨고 있다.

역사(驛舍)의 왼쪽 맨 뒤에는 서예가 류명희 씨가 새긴 박해수 시인의 “화본역” 시비를 쓰담다가 그 옆에 설치된 조각품에 눈길이 멈춘다. 눈비에 시달리고 바래저서 찢어진 “삼국유사의 이야기책”이 훼손되어 잘 조성하고 관리한 광장에 큰 흠집이 되고 말았다. 복원의 손길이 하루 빨리 필요하다.

잠시 후 역 대합실로 들어섰다.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은 보이지 않았다. 오전 11시인데 이 시각에는 상하행선 기차가 없는 것일까. 대합실에는 묵묵한 정적만 꽉 찼을 뿐 설렁하고 적막함이 눈처럼 쌓였다. 먹먹한 가슴이 저려온다.

역무원의 양해를 구해 플랫 홈에서 남북으로 뻗은 기찻길을 바라본다. 북쪽 상행선은 청량리행 한양 가는 길이고 강원도 강릉도 간단다. 하행선 남쪽으론 대구도 가고 남쪽바다 붉은 동백이 피는 해운대 동백섬 갈매기 나는 부산항도 갈 수 있다.

여기저기 기찻길로 가고 싶은 여행 생각이 불쑥 나온다. 철도변 건너편에 1930년대 지어진 급수탑이 있다. 커다란 덩치로 추억만 가득 담고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옛 영화스럽던 시절을 그리 듯 몸을 기울인다. 두꺼운 세월로 감싸인 급수탑 외벽을 안고 있는 집착의 줄기 담쟁이가 엎드린 채 까맣게 붙어 겨울잠을 자고 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것은 초록을 잃어버린 세월의 무상인가! 우수 경칩이 지나면 봄은 온다. 그 땐 담쟁이도 다시 한 번 녹색 줄기가 바람을 타고 기어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급수탑을 떠나 돌아오는 맞은편에 알록달록하게 단장한 레일카페와 휴식공간이 나를 손짓한다. 삼국유사를 논하고 천천히 쉬어 가라한다. 추억의 편린들이 쌓인 화본역, 소박하고 정겨운 간이역에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내일을 그려본다. 화본역에 멈추지 못하고 쌩쌩 달려가야만 하는 기차의 슬픔 운명도 생각해 본다. 꽃바람 부는 봄날이면 화본역을 찾는 상춘객의 발자취와 웃음소리로 화본에도 활기를 찾을 것이다.

물망초 같은 기다림을 생각하며 붙박이처럼 서 있는 화본역이 눈에 박힌다. 겨울나무들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떠나는 나를 보고 작별의 인사 흔들거린다. 크고 작은 나무들의 봄을 기다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발길을 옮긴다. 마음 아사하다.

2012년 2월 24일
군위농산 대표 황 성 창


저작권자 N군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