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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가을 단풍, 그리운 추억

admin 기자 입력 2012.11.12 23:03 수정 2012.11.12 11:03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여름이 지나고 어느새 빛 고은 짙은 가을이다.
하늘을 쳐다보니 마음이 파랗고 가을은 붉은 파도다. 유례없던 지난여름의 폭염도 백로(白露)가 지나니 기운을 잃었다. 절기 따라 상강(霜降)에 내린 서리에 새벽바람이 차다.

도톰한 녹색 잎사귀가 수척해지고 탱탱하던 줄기도 눈에 띄게 야위어 마른다. 길 위에 떨어진 은행이 짓밟혀 깨지고 상처를 받으면서 인간에게 건강한 씨 핵을 아낌없이 건넨다. 언제 온 가을인지 세월이 흐르는 강물 같이 느껴진다. 별처럼 반짝이는 단풍들 형형색색이다. 청순한 가을빛을 온 몸으로 느껴진다.

빡빡하게 살아 온 여름을 저만치 내려놓고 나뭇잎 사이로 어른거리는 가을볕이 따사롭다. 상쾌한 가을바람이 콧구멍에 와 닿는다. 하늘을 향해 훗훗 벌렁거려도 본다.

녹음을 뚫고 달려 온 계절의 이정표 간이역 붉은 단풍 가을이다. 동서남북 산천마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 어딜 보나 눈이 즐겁다.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구절초와 쑥부쟁이, 연분홍 코스모스, 보라색 개미취가 가을을 떠날 채비라도 하듯 수런수런 꽃대를 비벼댄다. 촘촘히 내려 비치는 금빛 가을 햇살 찰랑거린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칠언절구 산행(山行)에서 “서리 맞은 단풍잎이 봄꽃보다 더 붉다(霜葉紅於二月花)”고 했으며 박형준 시인은 단풍은 “바람과 서리에 속을 다 내주고 물들 대로 물들어 있다”고 붉은 단풍의 애끓는 한(恨)을 읊었다.

단풍의 아름다움 뒤에는 단풍나무의 치열한 생존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긴 겨울을 대비하여 양분을 저장하고 한 치의 오차 없이 엽록소를 파괴해야만 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찬란한 가을빛으로 물들어 간다.

팍팍한 삶의 몸부림 일지도 모를 일이다. 삶의 지혜와 열정만이 생존의 소명(召命)이라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교차한다. 수 만 번 흔들리는 세월이 지나고 갖은 고난과 역경 뒤에 얻어지는 결실은 고귀한 눈물의 번식이다. 하늘거리는 가을 단풍, 자연의 오묘한 섭리 감탄 할 일이다.

자연의 순리에서 인간도 단풍잎과 같은 초연한 삶의 지혜를 얻자. 더불어 인간 본연의 무한한 성찰을 느낀다.

단풍의 계절 가을이 오면 어릴 때의 추억이 솟아난다.
초등학교 졸 업해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유년기의 일이다. 고향 앞산에 단풍이 붉게 물들면 추수가 한창이다.

속담에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는 말이 있다. 추수하는 가을에는 매우 바쁘다는 말이다. 홀어머니와 가을걷이 때는 일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 어린 나이에도 새벽잠을 훌치면서 누렇게 익은 벼를 품앗이꾼 아저씨와 같이 야무지게 벼 베기를 시작한다.

새벽이라 찬 서리에 바짓가랑이를 흥건히 적시면서 억척같은 열성이다. 생각만 해도 대견했다. 해가 머리 위 중천에 떴다고 느낄 때 쯤 마을에서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린다. 때 맞춰 어머님 머리에는 점심 찬함을 얹혀 이고 오신다.

벼 이삭을 깔고 앉아 얼큰한 멸치에 무찌개와 짭짤한 자반고등어로 햅쌀로 지은 그 때의 밥 맛 지금 어디 가서 맛 볼 수 있을까. 그 맛 지금도 천하에 일품이다. 늦은 오후에는 새참으로 불그레한 사과를 한 소쿠리 주시면 옷깃에 슬쩍 문질려 껍질째 아작아작 씹어 먹던 사과 맛 꿀 사과다. 생각만 해도 입안 가득이 침이 고인다.

날이 어스름 할 때까지 하루 종일 벼를 베고 나면 손등이 통통 붓는 것 같다. 잠들기 전 손등에 동동 크림을 발라 문질러 주시면서 예스럽게 보시든 그 때의 그리운 모습, 어머님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하루 일에 힘들어 한숨 지우시든 녹슨 소리 지금도 귓전을 맹맹~스친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어릴 때의 아련한 추억들이 황금빛 들판을 볼 때 마다 떠오른다.
엊그제 부산문인협회서 주최한 가을 문학 기행을 다녀왔다.

대변항 뒤편 산중턱에 위치한 토함 도자기 공원이다. 바다 냄새 물씬 솟아오르는 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대변항은 소리 없는 파도가 바위를 들이 받다가 스르르 돌아눕는다. 멀리 청사포에 이르는 사이사이 징검돌처럼 띄엄띄엄 놓여 있는 섬들은 조용한 침묵이다.

단풍 든 숲과 수평선 넘어 파란 파도가 전설 같은 가을 풍광이다.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바다에도 가을은 와 있었다. 가을은 산에만 오고 가지 않은가 본다. 지난밤엔 겨울로 향해 떠나가는 가을비 내리는 소리가 제법 많이 들렸다. 고독한 명상을 쓸어 담듯 쓸쓸한 한밤의 적막이다.

가을이 겨울로 기울어져 간다는 불안함, 외로울 땐 망설이지 않고 옷소매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고민도 깊어진다. 석양에 낙조를 보는 것도, 가을 길 위를 머뭇거리다 떨어지는 붉은 단풍도, 새로운 시작을 위한 출발일지도 모를 일이다.

단풍을 빨갛게 물들어 낸 가을볕도 꺼져가는 불씨처럼 조금씩 천천히 싸늘해져 간다. 강열하고도 아찔한 붉은 단풍, 마음에 잔영(殘影)을 두고두고 가을을 그리워하련다.

부산 황성창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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