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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은종만 아제를 기리며

admin 기자 입력 2013.02.02 11:01 수정 2013.02.12 11:01

ⓒ N군위신문
부모님의 전 재산(100만원)을 손실한 작은아버지 때문에 나는 어린 시절 조부모 댁(소보면)에서 자랐다. 조부모(조부 은만기, 조모 유성귀)께서는 손녀가 맡겨진 이유를 아셨기에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며 말썽을 부려도 야단치지 못하셨다.

당시 어머니 장인신 씨는 군위군(부계면, 오천)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며 생계를 책임지셨다. 맨손으로 상경한 아버지는 잠잘 곳이 없어서 남산 의자에 신문지를 덮고 주무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천시만고를 겪으며 방 한 칸을 마련했고 나는 초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닐 수 있었다. 경상도 사투리에 깡마른 촌닭아이의 서울 적응이 쉬운 게 아닌데도 나는 오락부장으로 날렸다.

나는 중학교 때 초등학생 동생과 처음으로 조부모 댁을 찾았다. 지금처럼 교통편이 수월하지 않던 시절, 16살에게 서울에서 소보면까지가 만만치 않았다.

중풍으로 자리 보존하신다는 조모께서는 손녀의 방문에 군불을 지피며 소소한 거동을 하셨다. 조부께서는 손녀의 요구에 고래, 상어 등 방 한 칸에 모셔진 음식들을 내주셨다.

그동안 조모께서는 서울로 올라간 손녀의 기도를 매일 하셨고, 죽기 전에 보게 해 달라 주님께 소원하셨다고 했다. 나의 방문을 주님은총으로 돌리는 조모에 맞서 조부는 고래와 상어를 손녀에게 먹이려는 조상은덕이라 맞섰다.

그렇게 조부모께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의 종교로 심하게 타투셨다. 그 모습은 어린 시절 기억에 없던 것으로 나에게는 상처였다.

다시 서울로 떠나는 나를 보시며 조모께서는 눈물을 보이셨다. “손녀를 보았으니 이제 주님께 가도 여한이 없다”는 조모의 말씀은 빈말이 아니었다.

조모께서 돌아가시고, 조부께서 서울로 올라오셨다. 조부께서는 당신의 해소(해수咳嗽)를 심화시키고, 농사도 없는 서울생활을 싫어하셨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조부께서는 당신의 임종년도, 집의 풍수, 손녀의 대학전공 등 내가 싫어하는 말들을 주절주절 하셨다.

“나에게 어려움을 청하는 이에게 쌀을 거절한 적 없고, 대가를 염두 하지도 않았다. 종하, 종만은 나와 똑 같다. 어렵거나 도움을 받고 싶을 때 종아 종만을 찾아라” 조부께서는 이 말을 되풀이 하셨고, 나에게 ‘종하, 종만’을 복창시키기도 했다.

당시에는 조부를 이해하지 못했다. 조부께서는 기침이 심해지는 만큼 군위의 맑은 공기를 그리워하셨고, 농사에 대한 미련도 깊어지셨다. 공직에 열중하는 아들을 대신해 ‘종하, 종만’이 농사를 지킬 거라는 믿음을 안고 조부께서는 예견했던 임종년도를 지키셨다.

세월이 흐르고, 나는 조부의 확언대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화가인 내가 글을 쓰기까지는 어려움이 있었고 그때마다 생전 조부의 확언과 조모의 기도가 위안이 될 줄은 몰랐다.

내가 글을 쓰는데 도움을 주는 지인(현재, 경기과학기술대학 교수)이 군위에 체류할 일이 생겼다. 친분은 주변에 군위 연고를 찾았지만 내가 유일했다. 나는 종만아제께 전화해서 지인의 사정을 알려주며 도움을 부탁드렸다.

지인은 반신반의하며 종만아제를 찾았다. 종만아제는 일면식 없는 친분에게 푸짐한 회, 오가피술을 대접하며 군위방문을 환영했다. 그리고 지인의 어려움을 위로하며 도움을 주려 노력했다. 종만아제의 진심어린 모습은 지인에게 큰 감동을 심어주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속담처럼 종만아제는 군위를 찾는 외지인들에게 언제나 헌신적인 친절을 베풀었다. 절약으로 모은 자비로 군위군의 넉넉함을 알리려 노력했다.

종만아제의 대가없는 헌신은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문상객들의 칭송과 종만아제를 그리워하는 애달픔에서 다시한번 증명되었다. 조부 말씀은 사실이었다.

글 제공: 은영선 씨(‘가이공주, 행복여행, 봉황의 나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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