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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경복궁 터

admin 기자 입력 2013.02.19 11:35 수정 2013.02.19 11:35

↑↑ 은영선 작가
ⓒ N군위신문
저는 정도전을 많이도 미워했다. 정도전은 당시 삼척동자도 인정하는 흉지에 경복궁 터를 성사시켰기 때문이다.

성사배경에는 ‘경복궁 터가 아니면 초야 행’이라는 정도전 의지가 있었다.
정도전 의지는 하륜(신촌일대), 무학대사(종로, 남산(용산)) 의견에 동조하는 이성계를 굴복시켜버렸다.

경복궁 터는 관악산의 화기를 정면으로 받는(화기를 중화시키는 물도 부족한) 흉지였다. 그런 터에 들어가면 본인(임금)은 물론 자손들과 형제들까지 화마의 구덩이로 빨려 들어간다는 게 풍수이론이었다.

정도전은 왜 그런 터에 임금을 밀어 넣은 것일까?
정도전은 출세하기에는 어려운 모친(우씨)을 두었는데 야사에는 모친집안이 ‘승도, 재혼, 첩’이 떠돈다. 야사가 맞는지는 모르지만 정도전은 ‘여자의 재혼, 승도, 첩’에 과도한 폄하를 마련했다.

또한 우씨와 정씨에 대해 지나친 정치보복도 눈여겨 볼만하다. 그런 그의 행적은 고려유생을 말살한 태종(이방원) 보다 더 심한 냉대가 정몽주, 길재의 문하생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경복궁터는 정도전의 출세 한풀이로 결정되었단 말인가?

2012년 울진, 태백, 정선, 삼척, 동해의 길지를 떠돌던 저에게 어느 촌로(村老)가 이런 말을 던졌다. 숨겨진 야사(野史)가 전하는 정도전의 실토도 있다.

“하륜, 무학대사가 꼽는 길지를 인정한다. 그러기에 그 길지를 궁궐로 쓸 수가 없었다. 서대문은 후학들을 위해 숨겨두고, 종로는 백성들의 생계로 써야하고, 그러자니 임금은 흉지 밖에 없더라. 무릇, 하늘(백성)을 받드는 자(임금)는 백성을 생각하느라 잠을 못 자고, 백성을 바라보느라 자손과 형제도 버려야한다. 처음부터 용상은 잠, 자손, 형제도 없는 형국인데 비수가 날아다니는 터에 들어간들 어떻겠는가?”

정도전의 실토는 사실일 것이다. 그것은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며 군주의 하늘이다.’라는 정도전의 저서(조선경국대전)로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를 거치며 현재까지 정도전의 실토는 적중(的中)으로 달려가고 있다.
조선시대 경복궁에서 권력을 남용하는 자에겐 적중이 찾아갔고 정도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전처(신의왕후) 소생들을 외면하고 신덕왕후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일조했다. 방석이 왕이 되면 정도전의 권력이 강해지기 때문이었다. 권력을 갈망하던 정도전에게 경복궁의 비수는 어김없이 적중(的中)했다.

하늘을 받들고 살아야하는 경복궁 터, 오늘날 청와대, 그곳은 자신과 주변을 버리고 국민을 받드는 일념으로 보내야하는 길지로 정도전의 선택은 옳았다.

은영선 (‘가이공주, 행복여행, 봉황의 나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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