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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용사난중일기

admin 기자 입력 2013.03.05 17:40 수정 2013.03.07 05:40

“우리가 헤어져 살아서 무엇하랴”
암곡(巖谷) 도세순 가족의 외적피해 의흥현과 인각사서 겪은 일기

↑↑ 류미옥 씨
ⓒ N군위신문
▷‘용사난중일기’란
용사난중일기의 표지를 열면 ‘우리가 헤어져 살아서 무엇하랴’의 글귀로 첫 문장과 제목에서 보듯이 전쟁을 피해 피난길에 오르며 군위의 의흥관아에서 태수를 만나 도움을 받고 요양차 인각사에서 머물면서 무엇을 보고 느낀 것을 기록 하였는지 궁금하여 진다.
방년 18세의 암곡(巖谷)도세순은 경북성주 출생(1574~1653)(본관이 성주이며 몽기(夢 麒)의 2자이다.

이 글은 한 젊은이가 겪은 임진왜란 때의 일기로, 임진년과 계사년까지 일기를 기록하여 용사일기라 한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 했던 1592년 4월13일 경북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 개터 마을에서 왜적의 도륙질을 피해서 도세순 가족과 노비, 이웃과 함께 빌무산과 인근의 여러 산 속을 숨어 지내다가 김천의 증산면의 문예촌과 합천 율곡면 두사리를 거쳐 한티를 넘어 부계현 섶재를 지나 의흥현과 인각사에서 겪은 일들을 일기에 적었다 .

▷왜적의 만행과 천왕당의 치성
도적의 무리가 바다를 뒤덮고 적들은 살기가 등등하여 쫓고 쫓기는 모습이며 가족들과 노비, 친척들이 헤어진다면 살아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함께 피난을 떠나는 결정을 내리는 장면들과 불에 탄 집터를 배회하며 마을 어른 40인이 죽음을 당하는 광경과 5월28일에는 김천 증산면의 문예촌 마을을 오르며 천왕봉 신령에게 우리 일행이 앞으로 다가 올 액운을 모두 벗어나게 해 주소서.

친척인 종숙부의 어머니도 치성을 드리는데 나는 (도세순) 웃으며 치성을 드리는 것을 말렸다.
“만약 천왕이 있어 영험 하다면 읍내에 있는 천왕당이 어떻게 불길에 휩싸였겠습니까? 헛된 기원은 하지 마세요”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나를 보고는 “영명한 신앞에서 모름지기 그런 번잡한 사설은 늘어놓아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마 왜적의 침략에 천왕당이 불에 타긴 했어도 신령의 힘으로 보살펴 준다는 믿음이 있었지 않았겠나 생각이 든다.

▷난리의 곤궁한 속에서도 선조를 지극히 모시는 후손들
사당(祠堂)에 보전된 서책과 여러 물건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타다 남은 잡책 20권을 노비를 시켜 가져오게 한다. 또한 생활이 곤궁하고 전쟁 중의 혼란 속에서도 선조의 신주(神주)모두 신주함에 넣어서 벽에 걸어 둔다.

명절이나 기일이 닥치면 반드시 신주함을 열어서 천위(遷位)한다. 비록 난리의 곤궁함 중에도 선조를 모시는 예를 다 하고 있으니 그 근본을 쫏는 깊은 정성을 가히 알 수가 있다.
(의흥향교 위패가 임란 중에도 잘 보관하여 본래의 위패를 현재까지 보존하는 정신이 예(禮)의 근본이 아닐까.)

▷어머니와 동생을 떠나보내고 세상천지가 망망하여
1593년6월11일에 노비 명복이가 와서 광대원에서 어머님이 병환으로 돌아 가셨다고 한다.
세상천지가 망망하여 그간 예를 갖추지 못하고 장례를 치른 일들마저 차마 다 기록하지 못한다는 심정을 담았다.

전쟁은 전염병과 기근이 극에 달해 굶어 죽는 사람들의 시체가 들판에 널려 있다.
시체들은 살쾡이와 이리의 밥이 되고 까마귀와 솔개가 쪼아대니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다.
형님은 보리 일 때문에 팔계에 가셨고 나와 누이동생 복일은 옛집에 남아 있으나 식량이 다 떨어졌다.

나무 열매를 따고 푸성귀를 뜯어서 먹으며 겨우 죽지 않고 연명 하고 있지만 동생 복일이는 더욱 쇠약하여 기력이 다 해가고 있었다. 6월22일 굶주린 동생 복일이가 불쌍해서 이여한 어른이 데리고 가서 보리밥을 먹였는데 먹고 나니 숨이 막혔다고 결국 내 동생 복일이는 영원히 떠나 버렸다.
아~아 슬프고 괴롭다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동생을 업고 돌아와 다음날 임시로 묻었다.

▷의흥현감 아재에게로 떠나다
1594년 갑오년 12월 도세순은 부모와 형제를 앞서 보내고 다른 피난민들도 뿔뿔이 헤어지고 남은 우리 삼형제는 누이와 함께 이대기(李大基)아제가 현감으로 있는 의흥으로 길을 떠나는데 12월 엄동설한으로 눈길은 질고 미끄러워 다섯 걸음을 걷고는 엎어지곤 했다.
여행길의 어려움이 이보다 더 한 적이 있을까.

갑오년에도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나 보다 한 겨울내 눈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12월28일 동막에서 출발하여 팔거현(지금의 칠곡군 동명면 동명초등학교 인근)에 이르러 역촌 흙집을 빌어 자고 그 다음날 역촌에서 마주 있는 한티(지금의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서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로 넘는 고개 630m)를 넘어 부계현 앞의 내위에서 점심을 먹고 의흥의 남쪽에 있는 김언명의 집을 빌려 자기로 했다.

저녁 식사 후에는 고을 사람들이 길거리에 모여서 갈대 잎으로 만든 호드기 나팔을 불며 도적을 경계하고 있다. 요즘의 자율방범 활동이 아닐까.
다음날 섶재를 지나 의흥 관아로 갔는데 섶재는 부계면 창평리에서 산성면 운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지금은 큰골이라 한다. 운산리는 섶재마을의 행정지명 으로 부계면소에 최근까지 섶재장이 섰으나 지금은 서지 않고 있다. 의흥관아 태수를 만나 뵙고 굶주림으로 죽게 된 연유를 모두 고하니 태수아제는 오랫동안 탄식하더니 관노 권막동의 집에 머물도록 정해 주었다.

▷초하룻날에도 굶주림을 떨치지 못하고
을미년 1595년 정월1일 태수가 우리 형제를 관아로 불러 떡과 과일 술을 먹이고 말하기를 “너희들의 곤궁한 사정을 생각해 보니 참 딱하구나. 그러나 관아의 예산도 매우 적어서 사정이 어렵고 주위가 급하다”며 상위에 떡을 싸서 우리에게 주었다.

우리 형제는 물러나서 권막동 집으로 돌아왔다.
형제가 쓸쓸히 마주 앉아 한숨을 쉬며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먼 길을 왔건만 얻은 것이 무엇 인가?
오늘 같은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굶주리는 고민을 떨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구나.

붓 두 자루를 노비 연금이에게 주어 술과 떡으로 바꾸어 오게 했는데 연금이 마을을 한 바퀴 돌았으나 팔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때의 심정은 아마 근심 가득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며 꾸짖을 뿐이었으리라.

형제가 상의하길 만약 다시 되돌아가게 되면 헛되이 여비와 양식을 쓸 뿐이니 그냥 돌아가는 것보다 병을 핑계 삼아 이곳에 머물면서 여행 할 식량을 얻는 것이 좋을 듯하여 나는 (도세순)다리에 병이 났다는 핑계로 자리에 누워 신음을 하고 형님이 대신 관아로 가서 의흥태수께 아뢰었다.

“동생이 병이 들어 걸을 수 없으니 원하건 데 이곳에서 조리 하다가 나중에 돌아가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형님과 연금이는 다음날 떠났는데 홀로 주인집에 남아 있으니 이별의 아픔이 눈물을 뿌렸다.

▷인각사에서 일연스님의 비석을 보다
‘인각사’라는 절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하여 태수에게 청하여 그 곳에 가서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니 허락했다. 관노 봉학과 함께 출발하여 사하촌에 이르니 희문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자못 풍요롭게 사는 듯 하다. 봉학이 점심을 청하니 곧바로 밥을 짓고 술을 올려 먹은 후 희문의 소를 타고 인각사에 들어갔다.

절은 화산(華山 ) 아래 백천(白川) 위에 있는데 깎아지른 석벽이 서 있고 병풍을 두른 듯이 낭떠러지가 몇 길이나 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전각들은 높고 평평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단청 칠이 아름답게 빛난다. 극락전 앞에는 보각국사비가 있는데 이것은 고려시대 민지가 제작한 것으로 왕우군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긴 것이다. 그 연대를 상고해 보니 원정 을미년이다.(충렬왕 21년 1295년 비문에 새겨져 있던 것을 보았다는 증거이다)

보각은 이 절의 스님으로 고려조 불교를 숭상하던 시절에 대사로 존경됐다.
여러 차례 정헌대부 파유를 보내어 칙서를 받들고 뵙기를 청했으나, 보각은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결국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 서장을 잘 보존 하고 있다. 이 시기가 지원(至元)년 1264~1294년 이다. 스님이 몽골 글을 한 점 내 보이는데 그 글자체가 전서도 아니고 예서도 아닌 것이 읽을 수가 없다.
다만 주홍인장이 있는데 이것은 斗자 같았다. 세 번을 물어 보았는데 스님은 옥쇄라 했다.

▷인각사 건축물은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을까
가운데에 있는 대웅전의 방목에는 지정(至正)년간(1341~1368)에 다시 수리함이라 씌어 있다. 서쪽에는 높은 누각이 있고 유람을 온 여러 사람들의 이름자가 적혀 있다. 그 속에 이산악, 송진사 등 아홉 사람의 이름이 있어 스님에게 물어보니 병자년에 이곳에서 뱃놀이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볼만한 기이한 것들이 많아 종일토록 구경 하느라 여행의 힘든 줄도 몰랐다.(그 당시 인각사에 많은 유물이 있음을 밝혀 주는 것이다)
사판승인 법융 주지가 와서 인사를 했다. 붓 한 자루를 스님께 건네니 법융스님이 흰쌀 한 되와 곶감 한 꼬치를 보내왔다. 선방 신관스님 역시 떡과 국 막걸리를 보내와서 먹었다.

내가 가져온 식량이 다 떨어져 머물 수가 없자 8일에는 신관스님이 밥을 지어 보냈다. 이때 의흥에서는 초자를 구울 참이었다. 나는 붓 한 자루를 팔아서 콩 두 대를 사고 이것을 미숫가루로 만들어 먹었다 .

정월12일 눈비가 내리는데 의병승인 비장(감사監司) 유수(留守)병사 (兵使) 수사(水使)등을 따라 다닌 수행원이다) 우경방이 인각사에 와서 자신을 스스로 우좨주의 후예라고 말했는데 언변이 지혜롭고 또 학식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도세순)우좨주의 외손이라 말하니 경방은 몹시 기뻐한다. 여러 날에 걸쳐 곡식을 거두어 등급을 매기고 순행을 했다. 종이 몇 묶음과 도토리 넉 되를 나에게 주고 갔다. 정월13일에는 의흥태수가 한우와 권응생등 대여섯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이곳 인각사 앞 내의 흰 바위 위에 앉아서 해는 저물고 달빛은 비단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물빛은 맑고 깨끗하여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고 술을 여러 순배 하고 놀이를 마치자 절로 돌아와 잤다.

다음날 아침에는 풍류시를 지으며 신선처럼 노닐다가 여러 손님들은 각자 흩어지고 태수 이대기는 남아서 스님들을 모두 징발하여 나무를 벌목하고 옮겼다. 초자를 구우려는 것이다.
저녁에 태수는 관아로 돌아 와서 나에게 식량 다섯 되를 주었다. 정월 15일에 도원례 씨를 찾아 인사를 하고 술 석 잔을 마셨다. 점심을 하고 조 두 되를 빌려서 절로 돌아왔다. 신관스님이 찰밥 한 사발과 콩을 사이에 넣은 과자를 마련해 놓고 나를 기다린다. 두터운 정이 아니면 능히 이럴 수 있겠는가!

우경방이 주고 간 도토리 쌀을 삼보에게 주어 물에 불려 찌고 말리도록 했다. 또 이십문을 주어 백지 한 묶음과 짚신 세 켤레를 바꿔오도록 했다. 아마도 인각사를 떠날려는 준비 인 것 같다.

1592년 4월13일 피난길에 적었던 일기는 1595년 1월15일 인각사를 마지막으로 일기는 끝을 맺는다. 도세순이 떠난 후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인하여 인각사는 화마에 모든 전각들이 전소가 되어, 도세순이 보았던 대웅전과 극락전 백천(白川)(지금은 위천)이라 부르지만 아름다운 단청의 모습들이 비쳤다는 전각들과 서쪽에 있는 높은 누각에 풍류시를 걸어 놓았던 현판, 보각국사의 임명장인 서장과 주홍인장을 보여 주었던 스님, 선방에 수행했던 스님들과 우정을 나누었던 옥경스님과 관아에 심부름을 해 주었던 이후현 스님 그 당시 인각사의 모습들은 도세순은 일기로 남겨 놓았다.

그때의 인각사 모습을 찾을 길은 없지만 보각국사 비문의 마지막 겁화가 활활 타서 온 산하가 재가 될지라도 이 비(碑)는 홀로 남고 이 글자는 마모되지 말라는 민지가 발원한 염원만 인각사에 남겨져 있다. 조일전쟁의 참상이야 이루 말로 표현이 될까. 옛말에 우는 아이를 달랠 때 이비야(耳鼻也) 라고 하면 뚝 거친다. 코나 귀를 베는 남자가 온다라고 하니 얼마나 무서우면 그랬을까.

임란 때 왜적은 전리품으로 귀와 코를 베가서 귀무덤을 만들어 전승기념비처럼 만들어 놓고 자랑스레 여기고 있다.

▷인각사의 참모습을 그리며
답사를 온 역사학생들이 우러러 보각국사비 앞에 모여 “와! 고인돌이다”라고 한 학생이 외치자 어디어디 하며 허물어 질 것 같은 비각 안을 들여다보며 수근 거린다.
알아 볼 수 있는 글자가 마모 되어 있긴 하지만 설명 없이 누가 알아 볼 수 있을까.
13세기 최고의 지식인이며 지성인이 보각선사께 임금(충렬왕)은 스승이 되어 달라고 간절히 러브콜을 보내는 시를 적어 보낸 게 비문에 적혀 있음에도 고인돌로 밖에 볼 수 없는 현실을 어찌 책망 할 수 있나.

인각사와 보각국사의 위대한 업적과 정신문화를 알지 못하는 무지가 아닐까.
인각사가 대단한 호국사찰의 역할을 했던 것은 보각국사의 한민족의 역사 인식이 그대로 인각사의 스님들로 부터 이어져 내려 온 것으로 본다. 그 당시 이대기 의흥현감은 전치원과 함께 의병장으로 공을 세웠다. 1595년까지 도세순은 전각들이 하도 많아 하루 종일 구경을 했는데 왜 2년 후에는 인각사가 모두 화마에 전소 되었을까.

의병활동을 했던 의흥현감과 인각사에 머물던 선수행 스님들과 모두 화약을 만드는 일에 참여를 했고 인각사는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 사찰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정유재란(1597년 )으로 인각사 극락전 앞의 보각국사비도 화마에 쓰러지고 전각들의 소실로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용사의 일기를 읽고 난 후기
용사의 일기를 참으로 어렵게 구하게 되었다. 서점을 다 찾아도 용사의 일기는 없었다. 도두호 씨가 문중의 선친인 암곡 도세순의 일기를 번역을 해서 사비로 책을 출간 했기에 도두호 씨를 찾아볼까 했지만 주소도 모르니 찾을 길이 없고 용사일기 표지그림을 그려 넣었던 만화가 김현철 씨도 개인정보를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속담이 이렇게 마음에 다가 올수 있을까.
성주도씨 종친회를 찾아서 용사일기 책을 구하는 뜻을 밝히고 시간을 좀 달라는 종친회의 의사를 확인하고 며칠 후 반가운 소식이 왔다. 도점훈 종친회장님께서 용사일기를 나에게 한권 보내 주셨다.

너무나 귀한 책이라 몇 번이나 읽고 난 후 후기를 쓰게 되었다. 도점훈 종친회장님께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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