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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만사일생(萬事一生)

admin 기자 입력 2013.03.28 10:51 수정 2013.03.28 10:51

↑↑ 박종영 사무국장
ⓒ N군위신문
당(唐) 태종 이세민은 부친 이연을 도와 천하제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렇게 천하를 제패하기까지의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본래 수(隋)나라 관리였던 이연은 수나라 말엽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들어 산서, 하동 등 여러 곳을 누볐다. 그때 부친을 따라서 작전에 참가한 이세민의 나이는 겨우 18세였다.

그러나 반란군들은 진압하면 할수록 더욱 더 저항하였고 분산되었던 세력들이 한데 합하여 더 큰 세력을 형성했다. 당시 황하 하유(下遊)와 강화 사이의 광대한 지역대부분이 이밀, 두건덕, 두복위, 맹해공, 곽자하 등의 세력에 의해 통제되어 수나라에 대항, 강한 반격을 전개하고 있었다.

태원유수로 있던 이연은 비록 수나라의 녹봉을 받고 있었지만 수나라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수양제도 태원에 사람을 파견하여 그가 반란군에 동조하는지를 은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이세민은 이미 천하의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깨닫고 부친에게 권하기를 “날이 갈수록 반란군이 많아지고 있는 형편인데 아버님께서는 그들을 다 토벌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만약 그들을 토벌하지 못한다면 황제가 아버님을 그냥 두겠습니까?”

이세민은 이렇게 밤낮으로 부친을 종용,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자립하도록 권했다. 그래서 마침내 이연은 아들에게 설득당하여 태원을 거점으로 거병하고 관중으로 진격하여 당나라를 개국했다.

이때 이미 만신창이가 된 수나라는 강남, 하북 등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반란군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분분히 나라를 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세민은 다른 반란군들과 대적하여 싸운다는 것은 백해무익하다 생각하여 그들은 회유하고 그 세력들을 이용하는 수법으로 반란군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밑으로 규합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양제가 우문화(宇文化) 등에 의해 살해되고 그의 죽음과 함께 불과 39년이라는 짧은 통치기간이 막을 내렸다.

수나라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자 전국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 당나라의 천하통일 전쟁이 전개되었으며 이때가 이세민이 맹활약을 벌인 시기였다. 이세민은 먼저 설인고(薛仁杲)를 격퇴하여 투항시키고 농동(隴東)지역 전체를 제압했으며 이어 유무주(劉武周)와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세민 부자의 당 정권은 왕세충, 두건덕 등의 세력이 궤멸된 다음에 더욱더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이렇게 하여 중국 천하통일에 대한 이세민의 열망이 달성됐다. 천하의 제왕이 된 이세민에게는 인재를 알아보고 그를 부릴 수 있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당 태종 때 재상을 지낸 이정(李靖)은 본래 수나라 재상 양소가 자기 자리에 앉아야 될 사람이라고 극찬한 인물이었다. 이정이 이연의 거병을 눈치 채고 장안으로 가서 보고하려고 했으나 한발 늦어 이연에게 붙잡히는 몸이 되었다. 하마터면 자신의 거병이 수포로 돌아갈 뻔 한 이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이정을 사형시키고자 했으나 그때 이정을 곁에서 지켜본 이세민이 이정의 지혜와 용기를 알아보고 이연을 만류했으며 후일 이세민은 이정을 재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세민이 진왕(秦王)으로 봉해질 때 진왕부(府)에는 진숙보, 장량(張亮) 이정, 이훈 등 많은 인재들로 가득했으며 방현령, 두여회 등과 같이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역전의 인물들이 있었기에 그는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세민이 이렇게 눈부신 활약을 하여 이연의 사랑을 받자 황태자 이건성(李建成)과 동생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이 질투하여 형제간에 반목이 잦았다. 626년 형과 동생을 살해한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고 당시 29세 젊은 나이로 제위를 물려받아 정관황제(貞觀皇帝)가 되었으니 그가 바로 당태종 이세민이다.

당 태종은 사람들에게 늘 “昔日房玄齡從天下 備當艱固 出萬死而一生(옛날에 방현령은 나를 따라 천하를 평정하느라 고생을 하고 만 번의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오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이 고사는 ‘정관정요(貞觀政要)’에 기록되어 있어 목숨이 지극히 위험한 고비에서 간신히 살아난다는 뜻으로 쓰인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사용하는 구사일생(九死一生)은 굴원의 이소(離騷)에 “스스로 옳다고 믿으니 아홉 번 죽을지라도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구절을 문선(文選)을 편찬한 양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아홉 번 죽어서 한번을 살아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회와 원한을 품기에 족하지 않다”라고 평했는데 여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살아난다는 뜻으로 쓰인다.

재부군위군향우회 사무국장 박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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