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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스승 孔子

admin 기자 입력 2013.04.10 15:46 수정 2013.04.10 03:46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공자는 기원전(551~479년)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다. 孔子는 商나라 왕족의 몰락한 후예의 집안에서 출생 했다고 하는데 공자의 아버지는 숙량흘(무사)였다.

좌전에는 그가 용맹과 힘이 센 무사로 제후들에게 알려져 있다. 숙량흘의 부인은 딸만 아홉을 낳았기 때문에 조상의 제사를 모실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첩을 두어 아들 맹피(孟皮)를 낳았는데 다리를 절어 역시 선조의 제사를 모실 수 없었다.

숙량흘이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안씨의 딸 징재를 첩으로 삼았다. 숙량흘과 안징재(顔徵在)는 아들을 낳기 위하여 니구산(尼丘山)에 가서 기도를 드렸다. 춘추시기의 노나라인 추읍 창평향 지금의 산둥성 곡부 동남쪽 니산 부근 이다.

기원전 551년 음력 8월 27일에 안징재가 니구산 동쪽에 있는 기슭의 굴속에서 공자를 낳았다고 한다.

공자의 부모가 니구산에서 아들을 낳으려고 기도를 했고 또 공자도 니구산의 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숙량흘은 이 아들이 니산의 영기를 받고 태어났다 하여 그에게 구(丘)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자는 중니라고 했다. 후세 사람들은 공자의 이름인 구자를 피하기 위하여 니구산을 니산으로 고쳐서 부르고 있다.

공자가 세살 때 아버지인 숙량흘이 죽자 어머니는(顔徵在) 아들을 데리고 노나라의 수도로 이사를 했다.

공자의 고향 산둥성 곡부는 먼 옛날의 삼황오제 때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고 한다. 노나라의 수도(곡부)는 당시 노나라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역사가 유구하고 문물고적이 매우 많았으므로 나라에서 첫 번째로 공포한 역사문화유명 도시에 수록 되었다.

공자의 외갓집은 노나라에서 상당한 집안이어서 이들 모자를 돌보아 주기는 했으나 가장이 없는 생활은 여전히 힘들었다.

孔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에는 어머니인 안징재(顔徵在)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0대에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于學)고 회상했다. 공자의 어머니는 어린 공자를 데리고 궐리에서 혼자 살면서 아들을 詩와 禮 각종 기예를 배울 수 있도록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심혈을 기울이다가 어머니는(顔徵在) 34~35세 때 세상을 떠났다.

그때 孔子 母子가 거주했던 궐리의 옛집은 아직도 존재 하고 있으며 세상 사람들은 공자의 후대를 궐리세가 라고 부른다.

□周나라의 혈연국인 魯나라
중국의 고대 夏, 商(‘殷’이라고도 함), 周왕조가 있었다. 세 나라 왕조의 멸망은 경국지색의 여인으로 인해 무너졌다. 夏나라는 말희, 商나라는 달기, 周나라는 포사라는 여인에 의해 나라가 망한다.

후에 주무왕(周武王)에 의해 商의 주왕은 살해되고 周나라가 건국되는데 魯나라는 周나라 무왕의 아우이며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 백금이 세운 나라로 周나라에게는 가장 가까운 친척 국가이다.

공자의 고향 취푸는(곡부) 周나라 문화의 전통의례나 전통음악의 보존지로도 유명하다.

□곡부의 三孔을 찾아서
三孔을 답사하기 위하여 숙소를 나오니 궐리가에 후손들은 작은 수레에 각가지 상품들을 전시해 놓고 답사객들과 흥정을 하고 있다.

기웃거리던 나도 공자일대기의 글과 그림이 있는 포켓용 책과 더불어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라는 논어의 글귀가 새겨진 죽간을 샀다.

궐리가 거리 양옆의 기념품 가게들은 조상을 잘 둔 덕분에 자자손손 먹고 사는 것 같았다. 궐리가 끝에 공자의 공부(孔府)가 자리 잡고 있다.

孔府大門은 파란 바탕에 황금색 글씨로 성인의 집 ‘孔府’이라고 쓴 세로 편액이 걸려 있으며 양측에는 황금색 글자로 써 붙인 다음과 같은 주련이 있다.
“국가와 더불어 존귀함과 영예를 누리는 경사로운 집안이며 하늘과 함께 문장과 도덕이 영원한 성인의 집안이라네.”

여기가 孔子의 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하던 곳으로 총 463칸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직계자손은 대대로 연성공(衍聖公)에 봉해 졌기 때문에 ‘연성공부’라고도 한다.

□최초의 노천 강학인 행단(杏壇)
대성전 앞 杏壇은 孔子가 학문을 강연 했던 곳이다. 장자(莊子)어부(漁夫)에 공자가 치유하는 숲에서 노닐고 杏壇 위에 앉아 쉬면 제자들은 글을 읽고 공자가 노래하며 거문고를 탔다고 한다.

정자는 금나라(1115 ~1234年) 때 건축했으며 명나라 융경삼년(1569年)에 새로 건축 했는데 정자는 네모 난 것이며 황색기와와 겹처마지붕이다.

지금에 와서 볼 수 있는 ‘행단’ 두 글자는 금나라의 저명한 학자이고 대학사인 당회영(黨懷英)이 쓴 것이라고 한다.

□音樂 마니아인 孔子
孔子는 음악을 너무나 좋아 했으며 음악의 힘을 믿고 음악이 영혼을 순화 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孔子는 20대에 궁중악사 사양자(師襄자)로부터 거문고를 배웠다. 타악기 까지도 배웠으니 현재의 기타와 드럼 연주까지 할 수 있는 孔子 만능 뮤지션이다.

공자가 어릴 적부터 여러 악기를 가지고 놀았는데 10세 때는 혼례나 장례의 악사로 참여 하기도 했는데 사양자에게 거문고를 배울 때 곡조만 듣고 그 음악이 그리고 있는 인물의 피부 색깔과 얼굴 생김새 까지 알아맞힐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도 가장 가 보고 싶었던 곳이 순임금이 지은 소(韶) 음악을 들었던 공자문소처(孔子聞韶處)인데 실제 그 곳을 가 보니 아치형에 편액만 걸려 있었다.

제국역사박물관에 갔더니 韶樂 CD를 판매 하고 있어서 하나 구입을 했다. 우스운 얘기지만 집에 와서 茶를 한잔 놓고 韶음악을 들었는데 여러 악기가 어우러져 멋진 화음을 내는 것 같기는 한데 그 깊은 의미를 알 수가 있나.

군위를 답사 오시는 분들께 간간히 투어 중 韶樂을 들려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공자는 좋은 음악을 들으면 3일 동안 고기 맛을 모를 정도로 즐거워 했으니 진정한 책벌레에 음악마니아였다.

孔子는 9척 장신에 활도 잘 쏘고 말도 잘 타며 음악에 한 번 빠지면 맛있는 음식 따위는 돌아보지 않는 사람 자세가 반듯하고 온화하며 세상의 모든 지식에 통달한 사람으로 孔子는 육예(六禮)에도 능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六禮란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에 관한 학문을 의미 하는데 공자가 남긴 역사서인 춘추와 詩經 같은 시가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전에(古典)에도 뛰어난 식견이 있었다.

어(御)를 물어 보았더니 마차나 전차 같은 것을 모는 기술을 의미 하는데 孔子영화를 보니 주윤발이 마차를 몰면서 14열국을 주유 하는 장면을 보았다.

중국은 전쟁에 마차와 말 숫자가 전쟁무기로서 승패에 달렸다고 한다. 말 한 마리가 보병 5명을 기준으로 잡는다. 전쟁 전리품으로 말과 마차는 최고의 전리품 이었다.

다음에 소개 하겠지만 말을 순장시키기도 한다. 어(御)란 지금의 자동차 운전 같은 기술이다.

□위대한 교육가 孔子
대성전의 현판 만세사표를 보니 말 그대로 만세에 귀감이 되라는 孔子의 명령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대상에 대한 귀감으로 존재 하라는 교훈의 가르침이 아닐까, 孔子는 배우고자 하는 이는 누구든지 자신의 제자로 받아 들였다.

귀천과 빈궁의 분별없이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여겼으며 봉건사회에 제일 첫 번째로 교육을 평민에게 가져다 주신분이다. 마른고기 한 묶음만 가지고 오면 누구나 모두 배울 수가 있었다.

孔子의 제자는 3천명이며 그중 수제자는 72명이다. 孔子가 가장 아꼈던 제자가 안회이다 안회는 안징재 어머니의 친척으로 같은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안회는 孔子보다 먼저 죽었는데 얼마나 가난했던지 관을 만들 나무가 없어서 안회 아버지가 孔子께 마차를 부수어서 관을 만들자고 했는데 孔子는 거절한다.

자로는(子路) 孔子의 가장 충성스런 제자로서 孔子보다 9년 연하로서 제자 가운데 가장 연장자로 子路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정변이 일어나 장공의 부하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시체는 젓갈로 담겨졌다는 소식에 孔子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 집에 있던 젓갈을 다 쏟아 버렸다고 한다.

노(魯)나라에는 삼환씨가 있는데 계손 숙손 맹손씨로 권세가 왕을 버금 갈만큼 위세가 높았다. 그 세력을 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관직을 사임한 후 14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14열국을 주유하며 겪는 수많은 일들을 다 실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답사를 할 때는 한정된 시간 속에 가이드를 따라 다니다 보면 실제로 본인이 보고자 하는 중요한 곳은 그냥 스쳐 지나 갈수가 있다.

그래서 몇 곳을 정해 두고 좀 더 깊게 관찰 하고 싶었던 곳을 소개하겠습니다.

그 중에서 대성전 앞 포치의 운용석주에 얽힌 이야기와 진시황이 노나라에 분서를 하러 온다는 소식에 책을 감춘 노벽과 孔子의 옛 저택 우물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적이며 孔子의 후손이 살해당하는 비사, 얼마나 많은 孔子 후손이 죽었으면 孔子씨를 말렸다는 이야기, 孔府에 탐이라는 상상의 동물에 얽힌 교훈 이야기를 실어 드리겠습니다.

글제공: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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