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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스승 孔子(2편)

admin 기자 입력 2013.04.30 16:41 수정 2013.05.09 04:41

ⓒ N군위신문
□공자묘 (大成廟)
靑代옹정황제(雍正皇帝)가 친필로 쓴 대성전(大成殿) 금편액이 걸려 있는 大成殿 중앙 감실에 공자의 소상이 있고 大成殿내에 진열된 각종 고대 악기와 두루 볼거리가 너무나 많았다.

정전인 大成殿은 孔子廟의 주체건축으로서 역대왕조가 孔子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孔子廟는 공자가 죽은 후 그 이듬해 (기원전 478년 )에 건설하기 시작 했는데 그 당시 魯哀公(노애공)은 공자가 생전에 거주했던 삼칸의 옛 저택을 사당으로 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孔子의 사상이 역대 통치자들의 숭배를 받았으므로 孔子의 지위는 날로 높아지고 역대 군주들의 끊임없는 재건과 증축을 거쳐 孔子廟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孔子의 역사가 유구한 만큼 大成殿 규모가 대단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기세가 등등함을 느낄 수 있었다.

□중국 3대 고건축
曲府孔子廟와 북경고궁 태화전과 하북승덕의 피서산장과 함께 중국의 3대 고건축 군체로 알려져 있다.
기회가 주어지면 연암 박지원의 최초의 여행기 편인 열하일기를 소개 하고 싶다.

□용이 하늘을 오르는 듯 한 운용석주
대성전 앞 평대(황제가 군신을 접견 하던 곳)는 한백옥(漢白玉)으로 만들어진 난간이 둘러쳐 있고 겹층으로 된 처마아래 용이 아주 정교하게 조각된 10개의 돌기둥이 있다.

10개의 운용석주의 부조가 제일 특색을 띄고 있으며 중국고대의 석조예술의 걸작이라 한다.
기둥이 햇빛에 비치면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만 보일뿐 돌기둥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지어 북경 고궁의 용만 조각된 기둥도 이에 비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황제가 이곳에 들렀을 때 마다 황금색 비단으로 둘러싸서 혹시 있을지도 모를 황제의 시기를 피했다고 한다.

구름과 용의 모양을 조각해 놓은 석주 하나하나를 손으로 만져 보기도 하고 10개의 석주를 하나하나 헤아려 보기도 하고 석주 기둥을 감아 날아오를 듯 한 용이 햇빛에 비치면 기둥은 보이지 않고 용만 하늘로 오르는 듯 하다해서 자리를 옮겨 멀리서서 바라보기도 했다.

현장 유물을 직접 감상 하는 것이야 말로 최대 여행의 특혜이다. 대전 앞 옥외 테라스는 당시 공자의 제사를 지내던 제단으로 지금은 매년 마다 한번 식 열리는 곡부 국제 공자문화절의 개막식이 여기서 거행되고 있다.

□공부(孔府)의 전체적인 배치
孔府의 면적은 200여 무(畝)논밭 넓이의 단이가 1畝가 30평이며 그곳에 청(접객식)당 (거실)누각 460여 채와 화원이 있다.

그림과 조각으로 장식된 기둥과 날아 갈 듯 한 처마, 채색된 대들보, 기이한 꽃과 돌 정자 그리고 구름다리. 이것을 눈을 감고 상상하면 얼마나 궁장(宮牆)하고 아름다운지 그려 질 것이다.

孔府의 배치를 보면 앞쪽은 공적 업무 뒤쪽은 사적 주거 공간이며 중간은 동쪽과 서쪽 세 갈래로 나누어져 있고 북경의 고궁과 비슷한데 이는 중국 역사상 규모가 제일 크며 가장 호화로운 저택이다.

사적주거 공간으로 가는 길은 겨우 사람이 지나갈 만한 좁은 폭의 미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함이다.

□황제로부터 봉호를 받다
공자의 적손이 황제로부터 봉호를 받은 것은 한나라 고조 유방 때부터이다. 이후 원제(漢9대 )는 공자의 13세손 공패를 관내후로 북주의 정제는 공자의 31대 공장손을 추국공(封號이다)으로 봉했다.

공부를 연성공부라고 부르는 것은 1055년 송나라(宋인종)때 孔子의 46대 적손(嫡孫)공종원의 봉호를 문성공에서 연성공으로 고치고 정식으로 府를 설립하여 그 지위를 대대로 세습하게 했기 때문이다.

역대 제왕들은 처음에는 공자의 적손을 군(君)으로 봉하고 다시 후(侯)로 이어 공(公)으로 봉하여 점차 지위를 높였고 그들이 사는 집도 댁(宅)이 아닌 부(府)로 불렀다.

宋나라 인종이 연성공이란 봉호를 하사 한 후로 46대부터 금(金) 원(元) 명(明) 청(淸) 중화민국(民國)에 이르기 까지 1천여年 77대 동안 32대를 이어져 왔다.

연성공의 사회적 지위도 역대 황제들이 공자를 더욱 숭상하게 됨에 따라 점차 상승했다.
관료로서의 품계를 보면 송나라 때 4품에서 시작하여 3품 2품으로 상승 했고 명나라 태조 주원장 때 최고 계급인 정1품으로서 문무백관과 함께 황제를 알현할 때 연성공이 제일 앞에 섰다.

또 청나라 강희(康熙)황제는 연성공에게 황궁의 어도에서 황제와 함께 걸을 수 있도록 허락했는데 이는 어떤 귀족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영광이었다.

역대에 걸쳐 11명의 황제가 19차례 걸쳐 이곳을 찾았는데 이 역시 어떤 귀족들도 받아 보지 못한 총애였다.

11명의 황제를 보면 한고조, 한명제, 한장제, 한안제, 위문제, 당고종, 당현종, 주태조, 송진종, 청성조, 청고종으로 청나라 건륭황제가 여덟 차례 공부에 왔었고 황후가 낳은 공주를 72대 연성공 공헌배에게 시집보냈다.

청나라 자희태후는 76대 연성공 공령이에게 자금성에서도 말을 탈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했고 황제들은 매년 연성공에게 봉록을 수십만 냥의 백은을 주었다.

□공말이 공자씨를 말리다(孔末亂孔)
孔子 아래 8대가 모두 외아들 이었다가 제8대 공겸생에 이르러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가 부, 둘째가 등, 막내가 수였다.

첫째가 8대까지, 막내는 6대까지 둘째만 자자손손 이어졌다. 제35대 부터는 자손수가 많아져 10개파가 형성 되었다.

739년 당나라 개원 27년에 현종은 공자의 35대 공수지를 문성공에 봉했으며 그 뒤부터 이 작위는 대대로 세습되었다.

42대 적손 공광사 때에는 5대 10국 시기의 전란으로 말미암아 공부와 조정의 관계가 단절 되어 봉록마저 끊겼고 작위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공광사는 현지 사수 주부(지방관직) 벼슬로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공부에는 ‘공말’이라는 청소 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본성은 ‘유’였으나 그의 할아버지가 공부에서 최초로 청소하는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주인의 성을 따라 孔으로 고쳤다. 당나라 시대 이후에는 이와 반대로 성이 孔씨인 사람이 하인이 되면 다른 성으로 고쳤다.

공말은 공자의 후손으로 행세 하면서 문성공의 지위를 빼앗기 위하여 지방관리를 매수했다.
913년 후량 태조 건화 3년 봄 어느 날 밤에 42대 문성공 공광사와 그의 가족들이 살해당하는 참변이 있었다. 당시 공광사의 부인은 채 돌도 지나지 않은 외아들 공인옥을 데리고 친정 어머니인 장온(張溫)의 집에 가 화를 면했다.

이를 안 공말은 관부와 결탁하여 곡부성 밖 숲 앞 장양촌 (張羊村)에 있는 장온의 집을 포위하고 장온에게 얘를 내 놓으라고 협박했다.

마침 장온에겐 공인옥과 나이와 생김새가 비슷한 갓난 아들이 있었는데 張할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내 주자 공말은 이를 공인옥으로 알고 살해했다.

공말은 공자의 직계 혈족을 다 죽인 것으로 알고 孔府로 돌아가 인장(印)권위를 상징하는 도장)을 빼앗고 공자의 적손으로 행세 하면서 스스로 문성공이라 청하고 곡부의 대권을 장악했다.

공말의 횡포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했지만 당시는 난세였기 때문에 해결한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10년이 지났는데 이 기간 동안 공부에 孔씨는 한 사람도 없었다.(孔子의 진짜 후손을 말한다)

이 사건은 역사상 공말이 공씨 집안에 일으킨 亂이라 부른다. 이 10여 년간 공인옥은 이름도 고치고 외할머니와 모자지간으로 칭하며 살았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17세 때 서울로 가서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대학사(大學士)가 되었다. 그때 공인옥은 황제에게 공말이 공씨 집안에 일으킨 亂의 전말을 상주했다.

930년 후당 장흥 원년에 명종 이단은 이를 조사 한 후 공말을 처형하고 공인옥으로 하여금 제사를 책임지게 하고 곡부현 주부(시골말직)의 직책을 맡겼다.

이어 후당 장흥 3년에 공인옥이 문성공의 작의를 세습하는 것을 허가 했다. 이때부터 공씨집안이 다시 중흥 되는데 후세 사람들은 공인옥을 중흥조라 부른다.

후주(後周) 태조(太朝) 행노 때 공인옥으로 하여금 감찰어사를 겸직하게 했고 공인옥이 45세에 죽자 병부상서의 직을 내렸다.

공인옥의 아들 공의(孔宜)는 무관이었고 성인의 후손으로 황주군사추관을 겸직했는데 북쪽 거란을 토벌할 때 군량미 수성 책임을 맡았다가 거마하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

공부의 사저는 아주 좁고 미로처럼 되어 있어 실로 외부에서 침임을 하기로는 불가능 하다. 공말의 직업이 공묘지기 라고도 하는데 마지막 77대 연성공 공덕성의 누님인 공덕제의 딸인 가란여사가 외가에서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실었기 때문에 나 또한 공묘일을 했다기보다는 공부의 사저에서 청소일을 맡았던 것에 亂을 일으킬 가능성을 보았다.

다음편에는 孔府의 외채와 안채를 가르는 문의 조벽에 한 마리 상상의 동물인 탐(貪)에 관한 가훈의 의미와 광화문 앞 해치동물상을 비교한 교훈과 노벽에 관하여 실어 드리겠습니다.

글제공: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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