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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영원한 스승 孔子(2편)

admin 기자 입력 2013.05.24 16:42 수정 2013.05.24 04:42

ⓒ N군위신문
탐계도(貪界圖)
공부의 외체와 안채를 가르는 문의 조벽에 한 마리 동물이 그려져 있다.
가이드가 탐계도 그림 앞에 서서 무슨 동물인지 알아맞히어 보라는 말에 일행들은 상상의 동물인 기린부터 각가지의 동물 이름을 갖다 붙였다.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린이라는 신수를 닮았지만 기린이 아니란다.

麟角寺를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인 기린을 닮았나 하고 자세히 관찰해 보니 신성한 동물을 표현한 게 아니다.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 말 발굽에 몸에는 영롱한 비늘이 있어야 하는데 이 동물은 용의 머리, 개의 몸, 꼬리는 원숭이, 발굽은 소의 발굽, 피부는 뱀처럼 그야말로 그린 사람 마음대로 새로운 종의 동물을 창조했다.

그림을 보면 지금도 왼쪽 위에 보이는 태양을 먹기 위해서 입을 벌리고 다가서는 모습이다. 貪은 이름 그대로 거대한 몸에 무엇이든지 욕심을 내며 먹는 일종의 걸신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공자의 후손이 거쳐하는 내당에서 업무를 보기위해 취푸의 관청인 대당으로 드나드는 문의 조벽에 그려진 계탐도 로서 그 문을 지날 때 마다 공자 집안사람들은 누구든지 ‘그 대여 지나친 욕심은 부리지 마세요’라고 외쳐야 했다고 한다. 공자 가문의 가훈인 셈이다.

공자의 후손은 장자가 자동으로 승계하며 이 지역을 다스렸기 때문에 뇌물이란 그 끝이 자신마저 먹어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문 앞에 그림을 그려 놓고 교훈으로 삼았다.

광화문 앞의 해치(해태)
우리나라도 광화문 앞에 두 마리의 해치석상이 있는데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서 이고 또 하나는 조선시대 관료들이 드나드는 곳으로 관복을 입고 나쁜 마음을 먹고 남을 해치거나 정직하지 못하면 해치가 잡아먹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국회의사당에도 근사한 해태가 있는데 정직한 마음으로 올바른 정치를 하라는 의미인 것으로 신라시대 관복에도 사용을 하고 관아의 門에도 민화적 요소로서 교훈적인 공부의 貪界圖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08년 5월 서울시에서도 해치를 서울의 아이콘으로 선정을 했다. 광화문의 해치상을 복원하고 국회의사당에 해치상과 서울시의 해치도시로 상징성을 만드는 것도 중요 하지만 해치의 근본은 정직과 바른 정치 실현임을 공부의 탐계도를 바라보면서 매일 아침마다 공무를 보러 갈 때 후손들이 다짐을 하듯이 그 뜻의 새겨야 할 것이다.

9세손 孔鮒와 魯壁
孔子에서부터 마지막 연성공인 공덕성에 이르기 까지 2천5백 년 동안 77대가 연속 되는데 그 중에서 적자가 고향을 떠난 것은 3대에 지나지 않는다. 3대가 공부를 떠난 연유를 알아보자.

첫 번째로 고향을 떠난 사람은 공자의 9세손 공부(孔鮒)이다. 전국말기(戰國末期) 약 기원전 264~기원전 208에 秦始皇이 6국을 통일하고 폭정을 행했다. 孔子의 학설을 없애기 위하여 이사(李斯)의 건의를 받아 들여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자행했다.

무력으로 영토를 하나로 만들었지만 6국이 가지고 있던 사상 문화 경제 정치를 통일 한다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시간도 많이 소요 되는데 秦始皇과 李斯는 단시일에 개혁을 단행 하고 중국을 하나로 묶기 위해 희생이 필요했다.

그들은 전국의 모든 서책을 모아 중요한 것은 보관하고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서적들은 모조리 불태웠다. 이것이 焚書이다.

봉건 토후 세력들을 대변하는 일부 학자들을 땅에 묻었다 하여 坑儒이다. 책을 불사르고 학자들을 땅에 묻는다는 것은 문화 말살 정책으로 秦始皇은 폭군으로 李斯는 간신배로 역사에 남아 있다.

始皇 8년에 공부의 친구 진여(陳余)가 秦始皇이 산동으로 온다는 위급한 소식을 전했다. 孔鮒는 孔子의 후손으로서 선조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많은 책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숨길 방법을 생각했다.

孔鮒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나의 친구밖에 없고 秦은 나의 친구가 아니기 때문에 내게 무슨 위험이 있겠느냐 내가 먼저 이를 숨겨 놓았다가 그것을 구하는 사람을 기다리겠다’라고 말하고는 그는 밤새 선조 때부터 전해 내려온 논어(論語) 상서(尙書)효경(孝經) 예(禮) 등의 책들을 선조 때부터 살고 있는 집의 겹층벽 사이에 숨겨놓고 고향을 떠나 숭산(嵩山)에 은거하여 글을 가르쳤다.

후에 진승과 오광이 봉기를 일으켜 군사를 거느리고 秦나라를 공격 했고 孔鮒도 진승의 봉기에 참가 하였는데 진승을 그를 중히 여겨 博士로 모셨다.

그러나 아쉽게도 봉기에 참가한지 60일 만에 孔鮒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록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책은 고향에 온전히 보존 되었다.
孔鮒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동생 공등이 조상의 묘에 제사를 지냈는데 한나라 高祖 劉邦은 공등을 奉祀君에 봉했다.

漢나라 경제(景帝) 연간에 이르러 景帝의 아들 노공왕(魯恭王) 유여(劉余)는 궁궐을 확장하기 위하여 부근에 있는 孔子의 옛집을 뜯으려 벽을 헐자 갑자기 가는 대나무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孔鮒가 숨겨 놓은 책들이 나타났다.

가는 대가 부딪치는 소리가 난 것은 옛날의 책들이 죽간을 끈으로 이어놓은 것이어서 벽이 무너질 때 서로 부딪치면서 그와 같은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공부가 책을 벽 쪽에 숨김으로써 유가의 경전들이 남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 후 사람들은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원래의 집 벽 즉 노벽 부근에 새롭게 같은 벽을 세웠는데 이것이 지금 공묘에서 볼 수 있는 노벽(魯壁)이다.

본래 魯壁의 길이가 얼마나 길었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보면 노벽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지만 벽속에 죽간인 책을 숨기로 떠나는 슬기로운 지혜로 인하여 焚書가 되지 않게 선조의 유물을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주는 9세손 孔鮒의 훌륭한 마음을 魯壁을 바라보며 흠모했다.

두 번째로 고향을 떠난 사람은 48대손 공단우(孔端友)이다. 공단우 시대는 1128년으로 宋나라 高宗으로 금나라 침입으로 수도를 옮기는 기자 공단우도 고종을 함께 남쪽으로 이사를 하였기 때문에 그 또한 이야기가 길어서 생략하기로 한다.

76대 공령이(孔令貽)는 아들을 보지 못했다
76대손인 연성공 (衍聖公) 공령이(孔令貽)는 4명의 아내가 있었다. 본처 손부인은 재녕(濟寧)사람으로 자식을 낳지 못하고 孔令貽 나이 22세 때 손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손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곡부 민간의 풍씨(豊氏)를 첩으로 맞아 들였는데 그도 자식을 낳지 못했다.

孔令貽 33세 때 정식으로 도부인(陶夫人)의 이름은 숙의(淑猗)로서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세 살에 요절을 하고 孔令貽 43세 때까지도 여전히 자녀가 없어 이는 성맥(聖脈)을 잇는 것과 관계되는 대사이기에 陶夫人이 북경의 친정에서 데리고 온 시녀 왕보취(王寶翠)를 첩으로 두었다.

이 왕부인이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공덕제(孔德齊)는 4살, 공덕무(孔德懋)는 2살, 孔令貽는 48세의 나이로 임종을 맞이하는데 후손의 일이 가장 근심으로 1천년을 이어 내려온 연성공의 작위가 자기 대에서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도 그 당시 임신 5개월인 왕부인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다.

최후의 연성공
임신 5개월의 아내인 왕부인을 두고 孔令貽은 48세로 운명하고 그 후 5개월이 후에 위험한 고비가 지나고 드디어 작은 성인이 태어났다.

공덕성(孔德成)(1920년2월23일~2008년10월28)이 바로 공자의 77대 적손(嫡孫)이다. 태어난 지 3개월 즉 100일 되던 날 당시의 대 총통인 서세창(徐世昌)은 영을 반포하여 연성공(衍聖公)에 봉했다. 안타깝게도 孔德成이 태어난 지 17일 만에 어머니인 왕부인은 돌아 가셨는데 삼남매는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었다.

이러한 환경은 그들에게 서로 간에 더 깊은 정을 갖게 했다. 두 누나가 시집을 가고 난후 동기간의 그리움에 자신은 혈혈단신으로 아주 고독 하다는 뜻으로 혈여(孑餘)라는 字를 지었는데 이것으로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이후 중국 대륙이 공산화 되면서 1949년 장개석은 27세의 孔德成을 2천년 이래 孔子의 신성한 혈맥을 전승해 온 사람이므로 국지중보(國之重寶)국가의 중요한 보물이라 대만으로 데리고 갔다.

모택동의 문화혁명으로 광란의 도가니 속에서 孔子의 墓를 파헤치고 문묘와 서원 등 전통문화와 문물을 파괴하는 소식을 듣고는 어떤 일이 있어도 중국대륙에 발을 디디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그는 문화혁명 이후에도 조상의 墓를 찾지 못했고 그가 살았던 孔府에도 다시는 가보지 못하고 2008년 11월 대만에서 89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1990년 일본 윤리연구소 요청에 강연을 왔던 孔德成선생은 헤어진 지 42년 만에 친 혈육인 孔德懋 작은 누님과 부둥켜 앉고 목 놓아 우는 남매의 모습을 孔德懋선생의 일본인 친구들은 조용히 곁에서 지켜보았다.

1948년 남경에서 헤어진 후 이별의 눈물을 42년간 흘렸으나 만남은 고작 30분밖에 안되었다.

‘인생의 풍랑이 한 잔의 술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조국의 만리강산이 마음에 있으니 우리는 영원히 하나!’대만의 孔德成이 孔德懋 누님에게 보낸 詩이다.(風雨一杯酒江山萬里心)

강태공 사당과 맹자를 모시는 사당인 맹묘, 맹자의 직계자손이 거주하는 맹부, 맹모삼천지교의 비석, 제녕에 있는 무씨사당에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와 같은 내용의 화상석, 전국시대 학문의 요람이었던 직하 학궁에 관한 이야기와 孔子 제자들의 이야기는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실어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6월2일부터 일주일간 중국 운강석굴 외 여러 유적을 답사 한 후 군위군의 국보와 보물 삼국유사에 관하여 실어 드리겠습니다.

글제공: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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