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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인각사의 역사적 의의와 왜난 참화

admin 기자 입력 2013.05.28 17:47 수정 2013.05.28 05:47

↑↑ 손동수 씨
ⓒ N군위신문
군위군이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라는 이미지를 전국에 홍보하면서 군위 고로면에 자리하고 있는 인각사의 역사적 의의가 다시금 수면위로 떠올랐다.
삼국유사가 탄생한 곳은 팔공산 주맥인 화산의 북쪽자락 고로면 화북리에 위치한 인각사이다.

삼국유사의 찬란한 명성은 거듭 말하자면 고려 중엽 불교계의 대현으로서 보각국사로 추존된 일연선사(1264년)의 위대한 작품이다. 이 사서는 민속 자존적 사료로서 당시대의 정사인 삼국사기와 버금되며 비교적 당대 최고 지식과 재생적·개인적·민족적 사관과 의제 되지 않는 사고로 저술됨으로서 특이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고대 민족사의 근간이 되는 단군조선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보각국사 일연은 나라의 스승으로 제수 받았으나 끝내 조정에 나가지 않고 자기의 본분을 지킨 점이 선사로서의 독실한 의지를 지켰음을 나타내고 있다. 보각국사에 대한 전기는 영구보존을 위해 금석문으로 왕희지필법 집자 및 각자된 큰 비석이 있으나 일제의 만행으로 파손된 채 보관되다 현대에 이르러 재건됐다.

인각사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14대 선조(1529년) 임진난까지 웅장하고 화려한 형세로 존속해 왔다는 것은 군위군 류미옥 문화관광해설사의 글에 표현된 도세순의 일기나 기타 유물전기 등을 통해 소상히 밝혀지고 있다.

그간 인각사는 고려~조선~일제~현대 지나면서 지역민을 위한 교화안위의 역할을 해왔다. 특히 환난 임진난(1592년)이 터지자 의병활동에 나설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쟁의 필수물자인 초자를 제조했다는 기록은 투쟁사에 빛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난시에 적극 참여한 전국의 관군이나 유·불교 및 지역과 현지 의흥현의 민관의병과 함께 인각사의 승려들은 결사항전으로 맞서 결국 왜적을 몰아내는 승전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왜는 5년 뒤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화려했던 인각사는 외병들의 1차 전란시의 피해에 대한 보복으로 이 시기에 소실되었으니 임난 당시의 인각사의 의병활동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며 여기서 사찰도 왜군의 예외 없는 보복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부터 팔공산이 화랑도의 훈련지였다는 설과 군위(軍威)라는 자의와 같이 지역에 공산성 화산성(미완성) 성산성을 둔 지역으로서 ‘순박검장’이라는 준비성 있는 지역성이 유사시에 나라에 충성하는 지역민심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역사와 정신·문화적으로 가볍게 볼 수 없는 이 지역적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사찰이 인각사다.

헌데 이 중요한 역사문화재가 세월을 지나서 지금 이 같이 재평가되는 입지에서 원상회복의 속도가 지지부진한 것은 아이러니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역사와 정신문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과거의 외난에 참여한 공로를 생각해서라도 앞으로 지역사회 발전과 당장의 관광발전을 위한 기여 차원에서도 인각사의 원상회복을 위한 과업은 국가와 지역사회, 불교계의 당연한 처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명덕학원 손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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