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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이야기-(1편)

admin 기자 입력 2013.06.10 09:44 수정 2013.06.11 09:44

↑↑ 김완수 소장(군위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
ⓒ N군위신문
(가)군위의 역사

⑴군위는 적라(赤羅)이기를 포기하는가?

『삼국사기』에는 군위는 본래 노동멱현(奴同覓縣)인데 경덕왕이 軍威(군위)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말한다고 기록되어있다. 즉 서기 757년에 군위라는 이름이 처음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지명인 군위의 軍(군)자는 ‘군사 또는 ‘진(陣)을 치다’라는 뜻임으로 옛날 이곳, 군위에는 많은 군사들이 진영을 설치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김유신의 신라군사이거나 또는 왕권의 고려군사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하면 고대 군위는 지형, 지리상으로 보았을 때 전략적 요충지로 쓰였고 또 오늘날에 와서는 교통의 요지가 된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그 시대를 창조하는 역할을 가진 도시가 된 것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군위의 고대는 어떠했는지를 생각하는 것도 오늘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18세기에 만들어진 「적라지」의 읍호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적혀있다.

「군위의 옛 읍호는 노동멱현(적라)이다. 신라의 서울이 계림(鷄林)일 때 경사(卿士)와 직자(職者)가 이곳(노동멱현)에 많이 살았다. 그들 가운데 직자는 붉은 도포(絳 袍, 강자포)를 입고 있었다. 백성들은 옷의 빛깔로 경사와 직자들을 서로 구분하였다. 이들 직자들이 부른 ‘비단옷 붉도다(羅衣赤兮之謠)’라는 노래가 있었다. ‘적라’라는 고을이름은 이 노랫말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적라지는 의령인 남태보가 군위현감(1748. 9∼1753. 8)으로 제직하는 동안에 남양인 홍승(1612∼1688)의 여지(13세기까지의 전승기록)를 바탕으로 만든 읍지이다. 역사학계에서는 이 책을 조선 최고의 읍지로 찬양하고 있다. 이렇듯 적라라는 읍락이름은 노동멱과 함께 1세기이후부터 사용되어 온 것으로 생각되며 지금도 고려 이후의 고문집이나 금석문에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적라’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숨겨두고 말하려 하지 않지만 이 구슬을 끄집어내어 빛나게 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의무일 것이다.

적라(赤羅)는 위천 강물에 꼭두서니로 물들인 붉은 비단옷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이 강자포에는 비단 고유의 광택(luster)과 함께 이름다운 소리 견명(scroop)이 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강자포를 입고 군위 최초의 가무(歌舞)와 제천의식(祭天儀式)이 있었던 무성리의 장로평지를 찾아가 보자.

(註1) 노동멱현에 살았다고 하는 경사와 직자를 각각 정승과 제사장이라고 풀이한다.
(註2) 러스터(luster)는 실크섬유 표면의 난반사에 의하여 발생한 광택을 말한다.
(註3) 스크룹(scroop)은 비단들이 서로 스치는 소리(마찰음)를 말하는데 이것은 비단섬유의 미세구멍(core)에 의한 효과이다.

향토 연구사 김완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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