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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군위이야기(지난호에 이어서…)

admin 기자 입력 2013.06.20 11:21 수정 2013.06.20 11:21

↑↑ 김완수 소장
ⓒ N군위신문
⑵적라산은 군위의 진산이다.

군위에서 제일 먼저 이름을 얻은 산은 적라산이다. 이 산은 적라인들이 숭배하였던 신산(神山)이었으며 또한 진산(鎭山)(註1)이었다. 현감 남태보가 찬한 적라지(赤羅誌)에는 고을 남쪽 15리에 한적산(韓敵山)이 있는데 일명 적라산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선명히 나타나있다.

이 적라지는 임진년, 정유년, 정묘년, 병자년의 가혹한 외침을 겪고 난 뒤인 조선중기 때 만든 책인데 이 읍지에서 하필이면 적라산의 산 이름이 삼한의 적이라는 의미를 가진 韓敵山(한적산)으로 기록된 것은 반드시 어떤 구전(口傳)된 내력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추측하건데 한적(韓敵)이라는 명칭은 시기는 잘 몰라도 옛날부터 계속 ‘한적산’으로 구전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군위읍에는 경사(卿士, 정승)들이 살았다는 구전전승을 지닌 마을이 있다. 정리(政里, 政洞)이다. 이 마을에는 우정승이 살았다는 우정동(右政洞, 右政谷)과 좌정승이 살았다는 좌정동(左政洞, 左政谷)과 그리고 백마가 울면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흰재(白嶺, 백령동)라는 동네가 있다. 모두 이천년 동안이나 아름다운 설화를 간직해온 마을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설화 속에 군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눈치채어야한다.

마을촌로들의 구전과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들 정승이 모두 나(羅)씨 성을 가졌다함으로 탈해이사금시대의 적라산(赤羅山)에 온 정승들을 가리킬 것이다. 이 정리의 우정승과 좌정승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확실하지만 백제 개로왕(蓋鹵王, 455∼475) 때의 좌현왕(左賢王)과 우현왕(右賢王)이라는 이름에서 본 딴것이거나 또는 흉노(匈奴)의 왕, 선우를 보필하는 좌, 우 두 장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경사는 좌정승을, 직자는 우정승을 가리킬 것이다.

이곳 정리마을 북쪽에 고분(정3리 고분군)이 있는데 지금은 직경 10m정도의 봉분 1기만 당그라니 남아있고 나머지는 도굴된 상태라고 한다. 이들 고분에서 연질 토기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묘제는 석곽묘나 옹관묘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앞으로 더 많은 고분 자료가 이 지역에서 나와야지 이곳 적라산신화를 해명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곳은 노동멱현의 고지(故址)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노동멱의 노(奴)는 匈奴(흉노)(註2)를 가리키고 동(同)은 무리를 말하며 그리고 멱(覓)(註3)은 옛날에 중국 서남부지방에서 조개 꾸러미를 나타내는 화폐단위로 쓰였으므로 노동멱은 흉노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을 가리킨다고 추정한다. 여기서 ‘覓’은 마을을 가리키는 흉노고유어일 것이다.

이와 같이 노동멱에 살았던 사람들이 흉노가 확실하면 필자는 의성 조문국과의 친연설(親緣說)을 주장할 수 있는 좋은 근거사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릇 역사를 추정으로 서술하는 것은 정당하진 않지만 고대군위를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꼭 필요할 방법이다.

(註1) 진산(鎭山)이란 나라의 도읍이나 성시(城市, 도시) 뒤쪽에 있는 산으로 나라를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을 말한다. 이 산에서 왕이 나라를 위하여 제사를 지낸다.

(註2) 신(新)나라 황제, 왕망(王莽)은 백성들의 민심을 사로잡으려고 흉노를 공노(恭奴), 또는 항노(降奴)라 불렀는데 이는 결국 흉노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훗날 남흉노인 후(後)호한야는 자신의 동족을 북쪽 흉노와 구분하기위하여 노(虜)라고 불렀다.

(註3) 당나라 때 남조(南詔) 경내에서 교역할 때의 거래단위로 손가락정도 길이의 조개 16개를 1멱(覓)이라 하였으며 그 가치는 비단 4자 5치에 해당하였다.(漢韓大辭典12권, p588)

⑶군위에는 축제와 향교가 각각 세 곳에서 있었다.

군위(군)에서는 셋 지역에서 민속축제들이 있었고 또 각각 향교가 설립되어 문을 열었었다.
먼저 민속축제로는 군위읍(노동멱현)의 박시놀이와 효령(모혜현)의 널널이청청과 의흥(구산현)의 지애밟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 가운데 박시놀이와 지애밟기는 오래전에 복원되어 몇 년 동안 군민행사에 시연되어오다가 중단되어 버렸고 널널이청청은 아예 복원되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뇌리 속에 잊혀져버렸다. 이렇듯 효령의 향교와 축제만이 사라져버려서 옛 모혜현(芼兮縣)의 성쇠를 보는 듯하다. 그래도 효령(孝靈)은 14세기 고려 공양왕이전까지는 군위에서는 가장 큰 읍락으로 위세를 떨치던 곳이었다.

이 효령의 ‘널널이청청’은 오래전에 발굴, 복원된 구미시 선산(읍)의 ‘널너리청청’과 단지 명칭만 차이 날뿐 동일한 놀이일 것으로 생각되므로 지리상으로 볼 때 효령의 널널이청청은 선산 장천을 통하여 효령 장군당리(장군리의 옛 이름)마을로 옮겨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휘영청 달 밝은 밤의 구을지에서 “대밭에는 대도총총 널러리청청, 솔밭에는 솔도총총 널러리청청, … 슬피우는 저기럭아 널러리청청, 이내수심 부쳐다가 널러리청청, 우리엄마 전해주게 널러리청청” 이라고 노래하며 원무를 추는 붉고 푸른 치마, 저고리의 장군당리 처녀들을 생각하면 누구라도 가슴이 뛸 것이다.

처음에는 영남의 동해바닷가지방의 월월이청청이 이곳으로 전래되어 널널이(널너리)청청이 되었겠지만 이 놀이도 놋다리밟기나 강강술래와 같은 부류라고 한다. 현재 강강술래는 일본과의 임진년전쟁 때에 자연스럽게 만들어 불렀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학자에 따라서는 삼한시대부터 있었던 우리고유의 달 놀이라고 보아 동이족의 전통가무라고도 한다.

이들 놀이 외에도 효령에는 김유신장군에 관한 신유놀이(군위삼장군제)가 전래되어 오고 있었는데 이 놀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으로 남아있으므로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세계문화유산인 강릉단오제보다도 반세기나 앞선 민속이다. 그리고 이 신유놀이는 강릉과 같은 진한(辰韓)계의 단옷날의례이고 또 주신이 같은 김유신장군이긴 하지만 이들 단오의식의 발생요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강릉단오제와는 다른 성격의 단오제가 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군위에서도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는데 산지(山地)가 많고 자오곡(子午谷)인 지형조건으로 이 지역에서는 3군데만 향교가 설립되었다. 가장 먼저 설립된 곳은 효령향교이었고 나머지 두 곳은 군위와 의흥이었다. 효령향교의 창건과 쇠락은 이 지역의 토성(土姓)인 효령사공씨의 중조인 사공중상과 그 관련성이 매우 크지만 고증할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 다만 향교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장군1리 마을회관 옆에 ‘선댕이(선당, 禪堂)라는 명칭만이 구전으로 남아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전통과 역사를 가진 군위가 문화를 수단으로 발전하면 군위의 문화가 활짝 빛날 것이며 아울러 군위 사람들의 생활도 풍요로워 질 것이다. 세상 어느 나라, 여느 사람들처럼 군위사람들도 행복하고 장수할 권리가 있다. 여기에 ‘군위문화’의 필요성과 소중함이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 군위는 두 갈래로 나누어져 흩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지역을 넘어서는 의식으로 하나로 뭉쳐야한다. 그러나 지역을 지키는 보수성(保守性)은 꼭 필요하겠지만 의식의 개방을 전제로 한 보수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아래에서만 군위의 생활, 놀이가 발전하게 되고 나아가 군위만의 독특한 문화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군위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 소장 김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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