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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지록위마(指鹿爲馬)

admin 기자 입력 2013.07.23 10:44 수정 2013.07.23 10:44

↑↑ 박종영 사무처장
ⓒ N군위신문
윗사람을 속여서 권력을 농단한다는 지록위마(指鹿爲馬). 이 사자성어가 전래된 역사적 사연은 권력의 부침(浮沈)이나 조직의 성쇠와 관련해서 오늘에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운다.
중국 진(秦)나라 시(始)황제의 수하에는 조고(趙高)라는 환관이 있었다.

조고는 부친의 범죄로 어머니가 관노(官奴)가 되는 바람에 노예 신분으로 출생했다. 어려서 거세를 당하고 최하위 직급의 환관으로 궁정에 들어갔지만 천생이 영민했던 그는 까다로운 궁중예법 등을 열심히 익혀 국법에 통달했다. 자연스럽게 진시황제의 눈에 들어서 관직도 빠르게 올라갔다.

시황제가 여행 중 병사하자 곁에서 수행했던 조고는 승상 이사(李斯)와 공모해서 날조한 거짓조서로 황위 계승자인 맏아들 부소(扶蘇)와 그 휘하의 명장 몽염(蒙恬)을 자결하도록 만든 후 시황제의 우매한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황제자리에 앉혔다. 이어 그는 정사에 관심이 없는 황제 호해에게 참소(讒訴)해서 이사(李斯)마저 죽게 하고 스스로 승상자리에 앉아 권력을 전횡했다.

조고는 어느 날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 반대파 중신들도 가려내기 위해 일을 꾸몄다. 황제 호해에게 사슴 한 마리를 바치면서 “폐하, 천하의 명마(名馬)를 한 마리 바치오니 부디 거두어 주소서”라고 했다. 호해는 재미있다는 듯이 조고에게 “승상, 저건 사슴이 분명한데 어찌 말이라 하는 것이오?”하니, 조고는 매우 엄중한 어투로 답하기를 “저건 말이 분명합니다. 폐하께서 어찌하여 사슴이라고 하십니까?”

호해는 그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좌우의 모든 대신들에게 “어떻소? 그대들 눈에도 저것이 말로 보이오?”물으니 대신들은 조고의 눈치를 보다가 거의 대부분 “그렇다”라고 했다.
그리고 더러는 “아니다”하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조고는 나중에 그들에게 애꿎은 죄를 씌워 모두 죽였다. 그 후 궁중에서는 누구도 조고의 말에 반대하지 못했다.

‘환관권력’이 아방궁(阿房宮)에서 획책한 지록위마의 시말(始末)은 그처럼 황당하고 참혹했다. 조고의 권력 전횡이 극심해질수록 진나라의 형세는 날로 위태로워져 갔다. 그렇게 되자 조고는 호해 황제마저 모살(謀殺)하고 자결한 부소의 아들 자영을 옹립하여 진왕이라 부르게 했다.

그러나 큰 죄를 지어온 조고는 자영에게 죽임을 당한다. 당연히 조고의 3족도 함께 처형됐다. 진왕 자영은 재위 46일 만에 유방(劉邦)에게 항복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였던 진나라는 그렇게 3대 15년 만에 참당하게 붕괴했다. (기원전 209년)환관권역의 ‘지록위마(指鹿爲馬)’ 정치 탓이었다. 이처럼 중국 고사를 장황하게 인용한 이유는 현대사회에서도 사악한 환관적 권력이 기업 등 모든 조직의 존립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이나 세력은 지도자의 판단을 흐리게 해서 사익(私益)을 챙기고 종국에는 그 조직을 몰락하게 만든다. 이제 정치인이나 기업의 조직 구성원 모두가 이를 엄정하게 교훈 삼아 판단해야 할 시점이 됐다. 지금 우리는 지록위마의 고사를 자주 되새겨 교훈으로 삼아 살아갔으면 한다.

(사)국민행동본부 부산광역시 사무처장 박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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