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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취독성(衆醉獨醒)

admin 기자 입력 2013.08.16 11:39 수정 2013.08.16 11:39

ⓒ N군위신문
전국시대 초(楚)의 굴원(屈原)은 초나라의 귀족으로 풍부한 상상력과 뛰어난 창작력을 가진 천재 작가였다.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사기’의 굴원전(屈原傳)뿐이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굴원의 고향은 자귀(秭歸)로 무협(巫峽)부근의 산과 강을 낀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한원제(漢元帝)때 비운의 미인 왕소군(王昭君)의 고향이기도 하다.

굴원은 회왕을 가까이 모시는 측근으로 학문이 깊고 일처리가 매우 능란하고 지극한 충성으로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당시 조정에는 근상(靳尙)이라는 대부가 있어 굴원이 회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하여 기회만 되면 항상 굴원을 비방했다.

한번은 굴원이 회왕의 명령으로 새 법령의 초안 작업에 한창 열중하고 있을 때 근상이 다가와 새 법령의 개요를 말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굴원은 자신이 초안하는 이 법령이 초나라의 장래에 깊은 영향을 끼치리라 것을 알기에 이를 거절했다.

이로 인해 근상은 더욱 굴원에게 한을 품고 회왕에게 가서 충동질하여 굴원에 대해 나쁜 말을 많이 했다. 근상은 본래 말재간이 좋은 사람이어서 회왕은 굴원을 비방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되자 그에게 남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나쁜 점이 있다고 여기고 차츰 그를 멀리하더니 결국은 굴원의 관직을 박탈했다.

이일은 굴원에게 지울 수 없는 큰 마음의 상처로 남았고 이때의 통한으로 그는 중국 문학사상 유명한 문장을 남겼으니 그것이 바로 ‘이소’이다. 그는 이소를 빌어 회왕의 마음을 감동시켜 마음을 돌려 간신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다시 부르기를 바랐으나 그의 애절한 뜻은 끝내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후 회왕은 진(秦)나라의 이간에 속아서 우호관계를 맺었던 제(齊)나라와 단절하여 우방의 도움을 잃게 되었다. 이때부터 진·초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초는 이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한중(漢中)을 진나라에 빼앗기고 대장 굴개(屈匃)는 포로로 잡혔고 당매(唐昧)는 피살당했다.

또한 진국은 온갖 수단을 써서 회왕을 진의 무관(無關)까지 유인하여 그를 억류했다. 이에 회왕은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굴원은 몸은 비록 밖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국가의 일을 걱정하여 여러 차례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근상은 굴원이 돌아오면 자신에게 불리하다 여겨 경양왕(頃襄王)에게 굴원을 모함했다.

게다가 경양왕의 동생 또한 굴원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자 굴원은 한북지방으로 쫓겨났다. 그 뒤 굴원은 한북에서부터 호남(湖南) 멱라강(汨羅江)까지 유랑했다. 그는 강변을 헤매면서 시를 읊었다. 그때 한 어부가 그를 알아보고 왜 여기까지 왔느냐고 묻자 굴원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사람 모두 혼탁한데 오직 나 홀로 청백하고…모두 술에 취했으나 오직 나만이 깨어 있어 그들이 나를 쫒아 낸 것이다.”

어부는 그를 위로하며 세상의 흐름에 따르라고 권했다. 그러자 굴원이 말하길 “누가 자기의 깨끗한 몸에 더러운 것을 묻히려 하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저 강물에 뛰어들어 내 몸을 물고기들의 뱃속에서 장사지내리.”

그리고는 회사부(懷沙賦)를 짓고 음력 5월 5일에 몸에 돌을 묶고 멱라강으로 뛰어 들어 자살했다. 이 애절한 고사에서 후세 사람들은 굴원이 말한 ‘중취독성’을 인품이 고결하고 청백한 사람을 칭송하는데 널리 사용·인용하고 있다.

※중취독성(衆醉獨醒): 모두 취해 있는데 홀로 깨어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불의와 부정을 저지르지만 혼자(자신) 깨끗한 삶을 산다는 뜻.

글제공: (사)국민행동본부 부산시 사무처장 박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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