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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인각사 극락전 복원식과 일연선사 다례제

admin 기자 입력 2013.08.26 17:15 수정 2013.08.30 05:15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단기 4346년 8월 14일 일연선사 제 724주기 다례제가 인각사 극락전 복원식과 함께 이루어 졌다.

極樂殿 내부에 닫집과 대들보에 그려진 붉은 색과 푸른색의 조화로 길상 다복 존귀 하게 여기는 대상들을 모두 표현해 놓았다.

인동덩쿨 이른바 보상화문 장식문양까지 감상을 두루 하다가 수미단 하단부에 四神思想의 현무(玄武)를 그리는 단청기술자의 섬세한 붓놀림이 사실적 표현 기법에 감탄이 절로 된다.

極樂殿 추녀를 받치고 서 있는 곡선의 활주가 날아오르는 듯한 비상(飛上)의 몸짓을 하고 있는 듯하다. 極樂殿 복원을 위해 국사전에 아미타삼존불을 이건(移建) 해 놓았다가 아름답고 장엄하게 꾸며진 極樂殿에 아미타 삼존불이 봉안되어 極樂殿 복원식 행사까지 치르게 되어 이번 다례제는 더욱 의미가 깊었다.

*인각사를 찾아온 일본 어르신들
한달 전 極樂殿이 마무리 공사를 할 즈음 나이가 평균 칠십대 후반에서 팔십대 중반인 조금은 연로하신 9명의 어르신들이 가이드와 함께 인각사 답사를 오셨다.
일본인 어르신들은 한국의 국보와 보물이 있는 곳을 답사한다며 9박 10일간의 빼곡한 일정표를 보여주었다. 젊은이도 아닌 어르신들의 진지하신 모습을 본 해설사로서 다른 나라의 국보를 알고 역사까지 배우려는 그분들의 열정에 진한 감동을 받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안목(眼目)
“절 이름이 기린의 뿔이라 신기한지 학소대 벼랑에 기린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가이드의 통역으로 인각사 사찰명이 이해가 되었는지 신기하다면서 인각사가 위치한 화산이 기린의 형태를 닮았다는 설명에도 ‘기린이 상상이 동물?’ 하면서 흥미를 가졌다.

그러다가 한분이 極樂殿 앞에 왜 탑이 없느냐고 질문을 한다. 이분은 벌써 금당 앞에 꼭 탑이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기록에 大雄殿을 금당이라 했고 서라벌에는 절이 별처럼 총총하고 탑은 기러기처럼 늘어져 서 있으니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이라 했다. 절반이란 말도 불교에서 나온 말로 서라벌에는 집이 반절이 반 이라는 말에서 절반 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極樂殿 복원이 완공 되면 해체 보관해 놓은 탑을 제자리에 세울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미륵당 옆에 보관해 둔 탑을 보여 주었다.

*보물 428호普覺國師 靜照塔碑를 보고 깜짝 놀라다
일연스님의 행적이 새겨진 앞면인 양기와 입적 후 기이한 현상과 일연스님이 교류했던 관료와 문도들의 이름이 뒤쪽 음기에 새겨져 있다.

서성(書聖) 왕희지의 행서체로 집자된 보각국사비는 오히려 수난의 대상이 되어 왕희지체 연구를 위해 탁본 하는 바람에 글자가 마모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비석을 넘어뜨리고 모닥불을 피워 가며 탁본을 하는 바람에 훼손이 가속 되었다는 해설에 일본의 어르신들은 두손을 모으고 너무나 죄송하고 죄송하다며 이런 깊은 사연이 있는 줄 이제야 알았다며 이렇게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하고 이야기를 들어야 만이 역사를 바로 알 수 있다며 일본인들은 普覺國師碑의 남은 글자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임진왜란 7년의 전쟁을 끝으로 퇴각하는 일본군은 우리나라 수많은 서적을 가지고 갔으며 도요토미히데요시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엄선된 가장 훌륭한 삼국유사까지 포함 된 책 32종이 일본 천왕 왕실에 빌려 주었다고 하자 비각의 창살을 어루만지더니 “일연 스님 추모제가 있습니까?”물었다.
“예. 매년 음력 7월 8일 일연선사 다례제로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인각사의 유서 깊은 사찰의 역사를 알게 되었고 普覺國師 靜照塔碑 보물에 관하여 몰랐던 역사를 정확하게 배우고 갑니다”라고 일본 어르신들을 말했다.

“다음 행선지는 어딘가요?”물으니 “거조암으로 갑니다”라며 손을 흔들며 떠나시는 일본 어르신 일행을 가슴 뭉클하게 배웅해 드렸다.

*일연스님의 탄생과 몽골 천하 징키스칸
인간은 세상을 살면서 자기가 살았던 시대가 역사의 격동의 시대라고 생각 한다고 한다.
일연 스님의 탄생 시기에 바로 유라시아 4대 문화권을 지배한 세계의 정복자 징키스칸의 시대가 열린다.

일연스님 비문에 희종(2)년 1206년 경주 장산군(章山郡)에 아버지 김언필 어머니 이씨(李氏)사이에서 햇무리가 감싸는 꿈을 사흘 동안 꾼 후 일연스님이 태어났다고 새겨져 있다. 章山郡이 현제의 경산이다.

충선왕은 충렬왕의 아들로서 충선왕의 이름이 왕장(王章)인데 임금의 이름을 지명으로 쓰지 못하므로 경산으로 바꾸게 되었다.

징키스칸은(1162~1227) 기마부대를 이끌고 점령한 지역이 40여 개국 700여 민족의 777만 ㎢이다. 현재의 지도에서 보면 나라수가 30개국에 인구 30억이 훨씬 넘는다.

1227년 징키스칸이 죽은 해에 일연은 고려 수도 개경의 광명사에서 고려 승과제도의 승려시험에서 上上科에 장원하여 1236년 첫 부임지로 포산의(現 달성의 비슬산 )보당암에 머무르는데 몽고의 침입을 피해 무주암에 머물도록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았지만 무주암의 위치를 알 수 없어 묘문암에 머물렀다고 한다.

1237년 묘문암의 북쪽에 무주암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겨 깨달음을 얻고 삼중대사의 자리에 오른다.

당시 고려는 1170년 무신정변으로 위로는 정중부 이의민의 무신정권이 있었고 최충헌에서 최의 까지 내려오는 최씨정권 60년과 삼별초 까지 무신정권은 100년간 고려왕권 약화로 이어져 내려왔다.

징키스칸이 죽은 뒤 2대 오고데이가 1231년 고려를 침공 하여 무신정권이 강화도에 있는 동안 백성들은 몽고군과 싸워야 했다. 몽고군은 살육과 방화를 자행하여 그들이 지나간 군현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그때 산중에 있던 스님들도 장맛을 십년 동안 보지 못했다고 하니 고려인이 운명이 경각에 달렸었다. 연이은 몽골 침략으로 신라시대 거대유산인 황룡사 9층목탑이 불타서 잿더미가 되고 부인사의 초조대장경등 여러 문화유산이 불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공포의 몽골군과 싸우고 또 싸우고 했지만 강화도로 들어간 최씨정권은 계속하여 세금을 뜯어 가면서 연희를 즐기자 본토의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 속에서 민중들은 무신정권을 경멸하는 분위기가 되어가자 왕권강화를 염원하던 관리들도 결국 마지막 집권자 최의를 암살하게 된다.

*몽고의 요구사항 공물과 인질강요
고려 후기 무신정권을 끝내고 왕정복고를 이뤘지만 고려가 강화도를 나와서 몽고와 강화를 체결한 만큼 고려측의 약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과도하기 짝이 없는 공물량을 부과한 것이다.

금은 의복 말 2만필 아니면 말 1만필을 보내라 대마(大馬) 소마(小馬)각기 1만필식과 1백만 대군의 군복을 제작해 달라는 것은 고려 조정의 경제 능력을 고갈 시키고 자신들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

인질 강요로는 몽고가 고종의 자손과 대관집 부녀 대관의 자녀 1천명씩 보내라는 것은 아예 고려의 지배층을 몽고에 복속 시키고 고려를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기 위해서다.

자수(刺繡)를 놓을 사람과 말(馬)을 관리 할 사람 외에 기술자까지 무리한 요구를 해 오자 고려는 일부일처제로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죽어서 인구가 삼분의 일로 줄어서 보내 줄 수가 없다고 하고 수달피 1천장을 요구한 숫자가 너무 많고 구하기 어려워 사방으로 모우고 저축하여 겨우 977장을 모아 보내오니 그렇게 알기 바란다는 고종18년 12월 23일자 몽고 첩문이다.

고려 백성들은 몽고 전쟁에서 십년 중에도 장맛을 보지 못했다고 하니 전쟁의 참상이 얼마나 참혹 했는지 상상 할 수 있다.

일본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경주 행제소에 와있던 충렬왕(7년) 1281년 6월 일연은 76세의 나이에 충렬왕을 만났다.

남의 전쟁에 고려군인과 군수 물자를 지원해야 하는 충렬왕이 비통함에 젖어 있을 때 최고의 지식인이며 지성인인 일연스님을 만난 충렬왕은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그 후 충렬왕이 일연을 국사로 모시고자 간절히 청했던 詩가 普覺國師碑에 새겨져 있다.

*일연은 왜 삼국유사를 섰을까
강화이후 고려에는 몽골의 간섭이 미쳐오는 가운데 외세에 결탁한 새로운 권력층이 형성되고 이들에 의해 불법과 비리가 자행 되는 것을 보았다.

국가의 유지와 바른 정치 이는 곧 당시의 시대적 과제였기에 일연은 국사이자 민족주의자가 되어 역사를 알아야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 미래를 준비 할 수 있으며 반만년의 훌륭한 조상의 문명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홍익인간이란 글자 그 뜻대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대륙을 지배 했던 고조선의 뿌리를 전해 주고 싶어 했던 일연국사의 국가관은 아니었을까.

이스라엘은 천년동안 나라는 잃었다. 그들은 한곳에 정착 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리하여 1948년 오늘의 이스라엘을 건국 했으며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2세들에게 교육했다.

탈무드를 통해서 2세들의 정신자세를 올곧게 가르쳤다. 책의 저자는 한사람의 대상이 아니
라 이스라엘 국민 모두였다.

일연스님이 지으신 三國遺事는 고조선(古朝鮮)시대부터 고려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기까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정리한 책으로 인물 건축 종교 제도 지리 문화 국가들의 고대사를 정리한 책이기에 우리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며 후손에게 전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선물이라 마음속에 깊이 새겨 잠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글제공: 군위군 문화관광 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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