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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미 씨 |
ⓒ N군위신문 | |
지난 3일 군위신문 사무실로 한 어르신이 찾아오셨다. 그날은 군위읍 장이 서는 날이었다.
그 어르신은 자신은 박노미(75세)로 부계면 대율2리에 살고 있다고 밝히며 나에게 하얀 봉투를 내밀며 “밀린 신문 구독료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군위신문 애독자라고 덧붙였다.
나는 어르신께 감사하다고 말씀 드리며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어르신께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박노미 어르신은 연로하고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테도 불구하고 마을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따뜻한 봉사를 실천하고 계셨다. 박 어르신은 지난 1970년 11월 25일부터 1971년 8월 20일까지 당시 여추돈 군위군수 재임시절 군에서 밀가루를 보조받아(현금으로는 4만 6천원) 화전밭을 일궈 뽕밭을 만들었다.
그렇게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면서 1남 2녀를 키우셨다.
그런데 점입가경으로 남편인 故최재명 씨가 35세 젊은 나이에 시력을 잃었다. 그때부터 박노미 어르신께서 남편의 눈이 되어드렸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책, 신문 등을 읽어주었는데 그중에서 남편은 특히 ‘군위신문’을 읽어줄 때 가장 즐거워했다고 한다.
박 어르신의 남편에 대한 지극정성은 마을 대율리를 넘어 군위군 전체에 알려져 지난 1969년 2월 당시 군위군수 김정록 씨로부터 열녀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박노미 어르신은 시각장애인이 된 남편을 위해 자신의 눈을 대신 내놓겠다고 말했다. 흔히 긴병에 효자없다고 하지만 박 어르신은 예외인 것 같다.
자신의 신체 일부인 손가락만 베어도 세수를 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 불편하다. 그런데 아무리 부부라도 타인인 남편을 위해 그의 눈이 되어 50여 년간 수발을 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병든 노모를 보살핀 적이 있어 박 어르신께서 그동안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더욱 박노미 어르신이 존경스럽다.
박 어르신은 지난 2010년 4월 요양보호사1급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녀는 “이제 제대로 자격증을 취득했으니 어려운 이웃을 더 잘 돌봐드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형편이 어려워 금전적으로 도와줄 수 없어 겨우 몸으로 밖에 봉사를 할 수 없어 부끄럽다는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듣고 있는 나 자신이 더 부끄러워졌다.
봉사는 금전적으로 넉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넉넉 할 때 가능한 것임을 다시한번 깨닫게 됐다.
박노미 어르신은 “지금도 그때 밀가루 보조를 받은 것에 감사하고 있다. 그게 없었으면 그때 어떻게 살았을지…정말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40년이 지난 일에도 여전히 고마움을 간직하고 계신 박 어르신.
작은 고마움도 잊지 않고 오래 간직하는 박 어르신의 따뜻한 마음과 선행이 붉게 물들어가는 단풍처럼 오래오래 내 가슴을 물들였다.
글, 군위신문 발행인 사공화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