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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하자 6.25한국전쟁! 그 배경

admin 기자 입력 2014.06.03 20:46 수정 2014.06.03 08:46

ⓒ N군위신문
한국전쟁은 북한군의 남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50년 6월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함으로써 한국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북한괴뢰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한 달여 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어 붙이는 등 신속하게 전세를 장악했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과 원산, 평양까지 탈환하여 곧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장기화될 조짐이 나타났다.

38도선을 뺏고 뺐기는 과정에서 미국과 유엔을 시작으로 휴전문제가 거론되었고, 1953년 7월27일에 비로소 휴전협정이 서명됨으로써 3년1개월에 걸친 승리 없는 전쟁은 막을 내렸다.

◇한국전쟁의 배경
연합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이데올로기 대립의 주역인 열강들에 의해 38선을 기준으로 국토가 분단되면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이어 4차례에 걸친 회담은 우리 민족이 그토록 바라던 즉각적인 통일과 반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우리의 의지와는 달리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남쪽에는 대한민국 정부, 북쪽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각기 다른 정부를 수립하게 되면서 분단이 고착화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전쟁의 과정
소련의 도움으로 최신무기를 앞세운 북쪽의 통치자 김일성은 한반도를 공산화 시키려는 의지로 1950년 6월25일 기습 남침하게된다. 전쟁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한 달여 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어 붙이는 등 신속하게 전세를 장악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과 원산, 평양까지 탈환하여 곧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장기화될 조짐이 나타났다.

38도선을 뺏고 뺏기는 과정에서 미국과 유엔을 시작으로 휴전문제가 거론되었고 1951년 7월 개성에서 1차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개성이 38선 이북에 있다는 점을 이유로 유엔군측은 새로운 회담장소를 원하게 되었고 이에 소련군측은 유엔군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1951년 10월 판문점이 새로운 회담장소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민족의 동의 없이 분단된 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비무장지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한국전쟁의 일자별 전쟁일지
▷1950년
6.25 북한군 남침
6.26 유엔안보리, 북한군 선공중지 결의
6.27 미국, 극동 해, 공군의 한국지원 명령
7.20 대전 수복실함
8.1 미 제8군 사령관,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명령
9.15 인천상륙작전
9.28 서울 수복
10.1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
10.19 국군-유엔군, 평양탈환
10.25 중공군, 1차공세 개시
12.14~24 국군·유엔군, 흥남철수작전

▷1951년
1.4 서울피탈(1.4후퇴)
2.14 국군·유엔군, 평택-삼척의 신방어선으로 철수
3.15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
7.10 개성에서 휴전회담 개시
10.25 휴전회담장 판문점으로 이동
10.28 군사분계선 설정 합의
12.18 쌍방 포로명단 교환
▷1953년
8.20~8.26 부상병 포로교환
6.8 포로 송환문제 타결
6.18 이승만대통령, 반공포로 석방
7.27 휴전협정 조인

◇휴전협정
5월 30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에게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전 외국군의 동시철수를 제안했다.

6월 4일에 공산측은 유엔 측의 최종안에 원칙적 동의를 보내왔고, 6일에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휴전성립 후에 한·미방위조약을 교섭할 용의가 있고, 대한군사 경제 원조를 계속할 것을 약속하였다. 드디어 6월8일에는 한국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양측은 포로송환협정에 서명하였다. 1953년 7월 27일에 비로소 휴전협정이 서명됨으로써 3년 1개월에 걸친 승리없는 전쟁은 막을 내렸다.

◇휴전협정 체결배경
북한군의 불법남침으로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아군은 1950년 9월28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 계속 북진하여 1950년10월20일 평양을 점령,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1950년11월17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유엔군은 오산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15일 유엔군은 대반격 작전을 개시, 1951년 3월 4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1951년 3월 24일에 38도선까지 진격하였다.

1951년 3월 12일 미 제8군 사령관Ridgeway 장군은 “38도선에서 휴전이 된다면 유엔군의 대승리”라고 말한바 있으며, 미국정부도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는 문제를 유보하면서 휴전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1951년 6월16일 Trigbri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전의 휴전을 정식제의 하였으며, 6월 27일에는 Gromyko 소련 외무상이 휴전관련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 정부는 소련의 제의에 대해 검토 후 휴전회담 가능성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1951년 6월 29일 유엔군 사령관 Ridgeway 사령관은 1951년 6월30일 방송을 통하여, 공산측에 휴전을 위한 연락관 접촉을 원산항에 있는 덴마크 병원선에서 가질 것을 제의하자, 공산측은 1951년 7월 1일 방송을 통하여 개성에서 가질 것을 제의하였다

쌍방은 2~3회에 걸친 상호방송을 통한 제의를 통하여 1951년 7월8일 개성 북쪽에 위치한 ‘래봉장’에서 대령급을 대표로 하는 예비회담을 개최키로 합의, 최초의 접촉을 갖게 되었다.

예비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1951년 7월 10일 첫 회담이 개최, 26회까지 개성(래봉장)에서 회담을 갖고 1951년 7월 20일부터 판문점으로 회담장소를 이동, 휴전을 위한 회담이 계속되었다.

이 기간 중에 쌍방은 159회의 본회담, 179회의 분과위원회 회담, 188회의 참모장교 회담, 238회 연락장교 회담 등 총765회의 회담을 갖고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체결함으로 전쟁은 멈추었으나 오늘날까지 남·북간에 군사대치상태는 계속되고 있다. 금년 6월25일이 한국전쟁 64주년이 되는 날로서 다시한번상기(想起)하자.

자료제공: (사)충·효·예실천운동본부 부총재 김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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