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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충절의 ‘단심가(丹心歌)’

admin 기자 입력 2014.06.16 14:21 수정 2014.06.16 02:21

ⓒ N군위신문
요즘 ‘정도전’이라는 대하사극이 토·일요일 KBS 1TV에서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습니다. 쓰러져 가는 고려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정도전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고려를 반듯하게 세우고자 무척이나 노력하고 애쓰던 사람이 바로 포은 정몽주(경북 영천 출신)였습니다. 그는 황해도 개성의 선죽교에서 이방원(훗날 조선 태종)의 부하 조영규의 철퇴에 맞아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에 자리한 정몽주의 묘소 입구에는 그의 충절을 보여주는 단심가(丹心歌)가 적혀 있는 비석이 있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일 백번 고쳐죽어/백골이 진토 되어/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가실 줄이 있으랴”

그리고 그 옆에는 정몽주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시조 “백로가(白鷺歌)’가 적힌 시비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백로야 가지마라/성난 까마귀/흰빛을 새오나니/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더럽힐까 하노라”라는 내용입니다.

정몽주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습니다. 고려왕실이 흔들리고 밖으로는 중국이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바뀌었습니다. 거기에 왜구(일본)까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면서 우리나라를 침략했고 정몽주는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고려를 지키고자 이색,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와 힘을 합치는 한편 고려 마지막 명장인 최영 장군과 함께 훗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와도 뜻을 같이 합니다.

그렇게 고려를 개혁하자는 뜻은 같았지만 이들의 목표는 서로가 달랐습니다. 정도전과 이성계는 고려를 없애도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으나 정몽주는 개혁을 통해 고려를 바꾸길 원했습니다.

요동정벌에 나섰던 이성계는 결국 위하도에서 군대를 되돌리는 ‘위화도회군’(1388년)을 일으킵니다. 요동정벌이란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명나라가 우리나라 철령 이북땅이 한 때 원나라에 속했으므로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합니다.

철령 이북땅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자신들이 관할하겠다고 하자 고려 우왕과 최영 장군은 철령 이북 땅뿐만 아니라 그 너머 지역도 본래 고려의 영토라며 요동정벌을 주장합니다. 이성계 장군은 이에 반대했지만 결국 요동정벌은 단행되고 이 장군은 요동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계속되는 장마와 질병에 시달리는 군사들의 참담한 모습에 위화도회군을 일으킵니다.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 최영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고 당시 우왕의 아들 창왕을 차례로 내쫓고 공양왕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 시기까지는 정몽주도 이들과 함께 뜻을 같이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고자 하는 이성계와 고려를 지키고자 하는 정몽주는 더는 한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술자리에서 ‘하여가(何如歌)’라는 시를 읊어 정몽주의 뜻을 떠봅니다. “이러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즉 망해가는 고려 대신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시에 대한 정몽주의 답이 바로 ‘단심가(丹心歌)’였습니다.

정몽주의 생각은 알게 된 이방원은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해마다 5월이면 용인시에서 개최하는 포은 문화제가 정몽주의 묘역에서 열리는데 올해는 세월호 참사로 무기한 연기되었습니다. 경북 영천에서는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임고서원도 있으니 기회가 되면 한번쯤 찾아가 보심이 어떨는지요.

부산시 미래창조신문 편집국장 박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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