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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조부(殷晩基)께서는 사마담의 사적(史籍)을 암기해독(暗記解讀)하여 세상에 알리는데 헌신하신 凍棟邦麗明朝鮮의 적통자였다. (태백문화원발행 태백문화 제25집 참조)
사마담은 凍棟邦麗明朝鮮 濊海(동해)를 사무치게 그리워하였고 함흥부터 영덕에 이르는 바다에는 지구를 유지하는 용황이 키워진다고 했다. 삼척과 울릉도 주변의 바다에는 용왕(龒鎔湧用 凰媓滉楻)의 모태(母胎)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조부는 사마담의 상사병을 해원(解寃)하려고 일평생을 허비하였고 그 수고로움을 저에게 떠넘겼다. 홍련암의 동해용, 동해신묘, 울릉도바다 용오름처럼 용에 관한 전설이 널려있는데 모태까지 보태야하는지를 저는 조부에게 무던히도 따졌다.
조부의 염원 때문인지 저는 전국의 바다를 돌아보며 濊海(동해)가 용왕의 모태인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고성, 양양, 동해, 삼척, 울진, 영덕 바다를 헤집고 다니는 용의 사연 중에 울진바다의 용왕에 대해 적어본다.
저는 1996년 인사동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용왕의 사랑’을 주제로 그림전시회를 계획하였다. 장소는 울진군 골장동 용왕전(상왕전)으로 정했다.
용왕주제와 장소 상왕전이 평범하지 않기에 제가 조언을 구할 대상은 철학인 이인환 선생이 전부였다. 이인환 선생은 원성군청 시절 조선일보에 우수공무원으로 기사가 나갔고 출판사를 경영한 전력이 있었다.
선생은 그림전시회가 성공하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삼척바다의 용왕을 주장하며 전시회장소를 삼척시로 옮기라고 강요했다. 조부께서도 사마담의 사적을 근거로 삼척 앞바다를 중요시하였지만 삼척에는 용왕전각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울진에는 용왕전각, 용왕굴도 보존되고 있으니 선생은 저의 주장을 꺾을 수 없었다. 이인환 선생은 저에게 울진군청 공보계를 찾아서 성씨(姓氏) 윤에게 도움을 받으라는 조언을 하였다.
타지사람이 용왕전(상왕전)에 들어가려면 골장동 원로들의 허락을 받아야했다. 제가 원로들의 승낙을 얻기까지는 정병석 이장의 배려가 컸다.
1999년 정병석님과의 첫 대면에서 저는‘동해용왕의 허락을 받아 골장동 용왕전에서 그림전시회를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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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영선 그림전시회(1999년 골장동 상왕전(중앙, 은영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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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황당한 주장을 받아들여야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몇 달 전부터 일어났다.
골장동 앞바다에서 찬란한 용이 나타나 젊은 사람을 내려놓고는 도와주라는 꿈을 정병석님은 반복해서 꾸었다. 현실처럼 생생한 꿈속에서 정병석님은 동해용왕의 뜻을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병석님은 해몽(解夢)에 밝은 아주머니에게 내용을 설명하자 ‘마을을 알려주는 귀인이 나타날 거라’는 답변을 들었다. 정병석님은 남자귀인을 고대(苦待)하였는데 비리비리한 여자가 동해용왕을 들먹이니 기가 막혔다.
그래도 동해용왕 꿈 때문에 저를 원로회의에 소개시켜주었다. 저는 원로회의에서 그림전시회를 설명하여 허락을 받았다.
골장동 용왕전에 여자의 출입이 전무하였기에 정병석님은 점괘에 밝은 사람에게 상의하여 길(吉)하다는 결과를 받았다. 일 년 전에 일본역사학자가 골장동 용왕전을 방문하여 건넨 덕담도 작용하였다. 일본역사학자는 아름답고 역사성이 있는 골장동 용왕전을 널리 알려주는 사람이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1999년 7월에 그림전시회는 골장동 원로들과 울진군민의 도움으로 성대하게 열렸고 많은 인파가 다녀갔다. 그런데 전시회 마지막 날 정병석님이 사단(事端)을 벌였다.
정병석님은 지지하는 H를 국회의원 선거에 승리하도록 동해용왕에게 기도해달라고 저에게 부탁했다. 예술가에게 무례를 저지르는 대가로 주먹을 들어보이자 정병석님이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정병석님은 예전 지지자 C와의 사연을 소상히 설명하며 H를 향한 당위성을 읍소했다. 그런데 C와 H의 사연을 낱낱이 성토한 자리가 골장동 용왕전이었다. 용왕전에서는 선거기도가 금기였기에 저는 이인환 선생과 두꺼비보살에게 전달해보겠다고 했다.
이인환 선생과 두꺼비보살은 골장동 그림전시회를 방문하였고 정병석님과 인사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림전시회가 끝나고 저는 이인환 선생에게 정병석님의 부탁을 전했다. 선생은 젊은 시절 용왕에 관한 두려운 사건을 언급하며 산신기도 만을 허락했다.
두꺼비보살도 용왕의 분노를 거론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대신 H를 위해 부처, 예수님, 산신에게는 기도를 올려줄 수 있다고 하였다. 두꺼비보살은 대구에서 섬유를 수출하는 사장이었는데 IMF로 파산한 이후 용왕을 찾게 되었다.
“용왕에게는 자신과 혈족의 소망을 기원해야한다. 이를 어기는 것도 불행의 시작인데 C가 이기는 형국을 동해용왕의 힘으로 뒤집는다면 무시무시한 뒷감당을 어찌하겠는가. H는 욱일승천하지만 정병석씨에겐 설명이 불가능한 불행이 밀어닥칠 것이다.”
두꺼비보살은 험악함을 예견해주었지만 정병석님은 기도부탁을 강행했다. 두꺼비보살은 동해용왕에게 H를 위한 기도를 하였다.
국회의원선거는 재검표를 실시하는 접전에 정병석님이 지지하는 H가 승리했다. 정병석님은 환호했지만 두꺼비보살은 용왕의 힘을 선거에 이용한 후환을 걱정했다. 두꺼비보살의 걱정처럼 저는 큰 수술로 대가를 치렀다.
정병석님에게도 불행의 기미가 밀려들었고 저는 반성을 종용했다.
“나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동해용왕에게 소망을 요구하였다. 감격스럽게도 동해용왕은 나의 소망을 이루어주었다. 내 행동이 잘못이라면 그에 대한 벌은 나의 몫인데 왜 동해용왕 탓으로 돌리는가?”
정병석님은 용왕전에서 H를 거론하던 순간을 철회하지 않았다.
저는 ‘용왕의 사랑’이란 주제로 판타지소설을 썼고 그 사연은 2002년 경인방송에 소개가 되었다. 경인방송 촬영팀은 정병석님의 처남이 운영하는 골장모텔에 묵었는데 골장동 앞바다의 절경에 탄성을 연발했다. 예전에 저와 동행한 동아일보 기자도 골장모텔을 사이판에 비유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병석님에게 밀어닥친 불운은 깊어져갔다. 동해용왕의 힘을 확신하고 두려움을 절절하게 겪으면서도 정병석님은 반성을 거부하고 숱한 사연을 가슴에 담은 채 떠버렸다. 아름다웠던 골장동 그림전시회 뒷면에는 정병석님의 옹고집이 원망으로 차지하게 되었다.
2년 전, 이종주 선생(문학사랑 상임이사)에게 골장동 그림전시회를 설명하며 정병석님에 관한 사연을 털어놓았다. 바다를 노래하는 시인답게 이종주 선생님이 위로를 주었다.
“은영선 작가 주장처럼 골장동 용왕전과 할매굴 앞바다가 사랑을 기원하는 아름다운 장소이기 때문에 동해용왕이 그것을 증명하려고 정병석님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요? 동해용왕이 되신 문무대왕과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지만 동해용왕을 향한 정병석님의 신념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병석님은 부처님의 제자 또는 예수님의 종으로 새롭게 태어나 사랑장소를 전달해주는 메신저(messenger)로 행복한 삶을 누릴 것입니다. 은영선 작가는 큰 수술의 후유증에도 동해용왕을 간직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한민국 바다가 경이로운 것은 특별한 이들의 신념과 소망이 감춰져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연들을 끄집어내어 세상에 알리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입니다.”
언젠가는 은영선의 골장동 그림전시회, 정병석님의 사연, 이종주선생님의 위로가 울진바다를 수(繡)놓는 용왕전설이 되길 기대해본다.
※ 은영선 씨의 작품으로는 <가이공주>, <봉황의 나라>, <내 인생을 바꿔줄 행복여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