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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1)

admin 기자 입력 2014.07.18 11:12 수정 2014.07.18 11:12

ⓒ N군위신문
한 인물을 시대적 평가를 할 때 인덕(人德)과 학덕(學德) 업적(業績)을 논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지식인이자 종교인 기능을 다 갖는 것은 아니다. 왕대밭에서 왕대가 나고 순교자의 집안에서 순교자가 나오듯이 1969년 대한민국 최초로 김수환 추기경으로 서임 되어 카톨릭교에 주춧돌을 놓고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위상의 기둥을 세우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추기경(樞機卿)생가 주변 풍경은 그리 높지도 않은 동산과도 같은 산(山)으로 둘러싸인 언덕배기 위에 자그마한 초가삼간 벽면에 1993년 3월 31일 방문하여 용대리 마을 어르신들과 손을 맞잡은 사진이 있고 그 사진 속에는 곧 허물어 질 듯한 집 전체와 큰방과 작은방 창호지는 너덜거림에 사람 손길 머문 지가 오래 된 듯하다.

울퉁불퉁 느티나무 툇마루 가장자리에 둘둘 말린 멍석이 놓여 있고 오랜 세월 쌓여있는 먼지마저 어머니 분가루 같다고 느끼고 싶었을까 팔짱을 낀 채 추기경은 오랫동안 사색에 잠겨 있었다.

59년 반세기가 넘어 찾아온 옛집 툇마루에서 추기경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하고 방문자들은 궁금하여 사진 속을 뚫어질 듯 바라보신다.

추기경 생가를 찾아오신 전국의 방문객들은 방문도 열어 보고 이렇게 작은 방에 옹기종기 살았겠지 하시며 부엌의 솥뚜껑도 열어보고 아궁이에 불을 지핀 흔적이라도 찾아볼까 하고 아궁이 안을 들여다보시는 고령의 어르신들, 뒤뜰에 떨어진 옹기 조각이라도 보시면 무슨 산삼이라도 캔 듯이 좋아 하신다.

초가지붕 용마루에 올려진 용마름의 솜씨도 평가 하시고 나무기둥을 만지시며 앞뜰에 펼쳐진 풍경에 참으로 편안하고 좋은 자리에 집터를 잡으셨네 하시며 마당가에 나무들과 풀 한포기도 예사로 넘기시지 않으신다.

떠난 지 59년 만에 군위를 찾아온 추기경은 군위초등학교(당시는 보통학교)와 옛집이 있는 용대리에 찾아와 유년의 이야기를 故정채봉 작가에게 들려주었다.

추기경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구슬을 꿰듯 감동적으로 연재되어 소년소녀들에게 인기를 끌었는데 동화작가 故정채봉님의 유작으로 이경철(문학평론가)씨가 바보 별님이란 제목으로 세상에 선보이게 되었다.

이경철님의 서문에 이 원고는 소년한국일보<저 산 너머>라는 제목으로 1993년 5월1일부터 8월7일까지 78회 연재된 작품인데 당시 이 작품을 펴내고자 했으나 생전에 추기경님께서 펴내는 것을 간곡히 만류 했다고 한다.

추기경의 조부는 광산김씨로 충북 논산시 연산에 양반가문으로 충청도 땅에 천주교가 전파 되던 초기부터 신앙생활을 하다가 병인박해 때 연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옥중 순교 하였다.

조모 강말손(姜末孫)여사는 남편 순교 후에도 어린 자녀와 교우들의 뒷바라지도 성심껏 했다고 전해진다.

익산시 여산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온 신자들이 모여 살면서 부터이다.

경기도와 충청도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대둔산(大芚山)과 천호산(天壺山)이 있는 진산, 금산, 고산, 여산으로 숨어들었다.

모두 산이라는 명(洺)을 지닌 곳인데 이들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숨어 지내며 산골짜기 마다 교우촌을 이루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어느 믿음이 약한 예비신자가 배교(背敎)를 하여 교우들을 밀고 함으로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났다.

금산, 진산, 고산 등을 속읍지로 두고 있었던 여산부사의 권한은 막강했다. 행정뿐 아니라 사법권과 군권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산부사가 내두르는 박해는 참으로 혹독했는데 심산유곡에 숨어 살던 천주교 신자 26명을 잡아들여 모진 형벌을 주어 처형했다. 무진박해(1868년)가 일어 난 것이다.

천주교 신자를 굶겨서 죽이기도 했고 백지사(白紙死)터에서는 도모지사(塗貌紙死-얼굴에 물을 뿌리고 종이를 붙이기를 거듭하여 질식사 시키는 백지사(白紙死)였는데 일명 도모지사(塗貌紙死라고도 한다)라는 형벌을 내려 죽였다.

요즘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도무지 라는 말은 도대체 누가 알겠는가라는 뜻을 지닌 한자어 도모지(都某知)에서 유래 했다는 설도 있지만 죽어도 모르겠다는 의미의 도모지에서 유래 했다는 설도 있다.

도모지 사형에 쓰였던 종이가 흰색이었기에 백지사형(白紙死刑)이라고도 했으니 쇄국정책의 날카로운 칼날은 천주교 신자들이 당한 희생의 잔혹상이 여실히 남아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조모 강말손(姜末孫)도 강인한 여인이었다.
조선 팔도에 천주교도들을 모두 잡아 들여 참형에 처하던 병인박해(1866년) 당시, 남편과 함께 옥에 갇혀있던 한 여인이 풀려난다.

임신한 여인은 처형하지 않는다는 당시 법에 의해서다. 관가에 재산을 몰수당해 집도 없이 떠돌며 이삭을 주워 옥바라지를 하던 여인은 하늘의 별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움막 짚단위에서 아들을 낳는다.

갖은 고생을 했지만 신앙심이 강했던 여인이 김수환 추기경의 할머니 강말손(姜末孫)여사이시다.

추기경생가를 방문하시는 분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은 추기경의 유년에 대한 이야기와 가족사, 옹기 장사를 하셨던 어머니 이야기에 가장 많이 관심을 가진다.

옹기 장사를 하시면서 아들 둘을 하느님의 자식으로 만드신 추기경의 어머니 또한 일찍 남편
을 여의고 가장으로 생활을 꾸려 가셨던 것은 조모와 같이 강인하며 신앙심이 돈독하셨던 어머니를 회상하신 추기경님은 모항(母港)이라 하신다.

바다와 같이 넓은 도량을 가지신 어머니라 생각 한 것이다. 첫 부임지인 안동 성당에서 받은 녹봉으로 인삼까지 사드린 효자이기도 했다.

다음번에는 현재 용대리에 살고 계시는 이경조 어르신이 들려주신 추기경님의 가족사 이야기와 추기경님의 형님이신 김동한 신부와 함께 아버지 김영석옹의 묘를 이장하러 오셨던 이야기, 추기경님 생가 주변 옹기 가마터와 옹기 건조지(현 화장실 자리)동막 위치, 우물가 이야기와, 번성했던 주막집이야기, 추기경님이 용대리 생가를 방문 했을 때 정점봉 어르신께 감사하다는 추기경님이 남기신 말을 무엇이었을까요?

추기경님이 어린 시절 살았던 옹기골 마을을 다녀가시면서 남기신 세 가지 자신에 관하여 자신을 바보로 표현한 자화상과 나눔은 풍요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교훈적 이야기와 함께 생존해 계시는 추기경님생가 주변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다음편에 실어 드리겠습니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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