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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의 아호는 옹기(甕器)이다.
추기경의 아호가 알려 지게 된 것은 당시 평화신문 보도에 따르면, 서울대 교구 명동 주교본당 박신언 몬시뇰이 2008년 8월 29일 서울 혜화동 김추기경 집무실에서 열린 옹기 장학금 전달식에서 였다.
박 몬시뇰이에 따르면 2002년 3월 김추기경님을 찾아뵙고 기념사업 성격의 스테파노(추기경세례명)장학회 설립을 건의하자 그 취지에 찬성하고 사제를 털어주셨다며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셔서 이름을 옹기라고 손수 지어 주셨는데 그것이 추기경 아호(甕器)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고 밝혔다
주위의 몇몇 측근은 이를 알고 있었으나 추기경 자신이 원치 않아 그동안 공공연히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추기경의 아호 옹기는 박해시대 신앙 선조들이 산속에서 옹기를 구워 내다팔며 생계를 잇고 복음을 전파한 수단이자 좋은 것과 나쁜 것 심지어 오물까지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며 옹기라는 이름을 제안 했다고 한다.
추기경의 아버지(故김영석)도 옹기 장사를 했다. 추기경이 보통학교 1학년 때 부친 故김영석이 별세하자 어머니는 거의 평생 동안 옹기와 포목을 머리에 이고 행상을 다니며 자식들을 키웠다.
맨 처음 옹기골은 점골이라 하여 무질바우에 있었는데 후에 용대리로 옮겨 왔다고 한다.
용대리에 살고 계시는 이경조 어르신은 김추기경이 외삼촌 되시는데 이경조 어르신의 부친인 故이윤석 당시 18세와 추기경의 첫째 누나인 간동댁(데레사) 누님은 당시 16세로 1918년에 결혼해서 1927년에 누님이 돌아가셨으니 9년의 결혼생활을 하였다.
이경조 어르신께는 추기경의 큰 누님이 큰어머니가 되신다. 이경조 어르신이 어릴 적에 故이윤석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로 추기경의 누님인 간동댁·김천댁·행천댁 세분이 있었는데 그중에 김천댁 누님은 성질이 걸걸 하시고 옹기장사와 전도를 하러 다니셨다고 한다.
추기경이 8살 때 아버지(故김영석)가 돌아가시자 가리미 동산 공동묘지에 산소를 썼는데 1960년대에 김동한(신부) 형과 추기경이 오셔서 아버지(故김영석) 묘를 이장해 갔다고 한다.
추기경은 90년대에 용대리에 오기 전에 이미 60년대에 한번 다녀가신 계기가 아버지묘를 이장하기 위해서였다.
용대리에 옹기 가마굴터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여쭈어보니 맨처음 옹기를 구운 옹기장이는 정점봉의 부친(故정명암)이 효령면 노행리에서 옹기를 굽다가 무질바우에서 하다가 다시 용대리로 나왔다고 한다.
추기경 생가가 공소 역할을 하면서 1년에 두번 안동에서 신부가 오셔서 마을 신자들과 미사를 드렸는데 우리 아버지(故이윤석 베드로)가 고해성사도 했다고 하셨다.
1993년 추기경님이 생가를 방문했을 때 故박규수(도치라고도 부른다)씨 부친이 추기경께 전해준 이야기가 “자네 누님 중에 김천댁 누님이 말이야, 얼마나 힘이 셌는지 옹기 장사도 부지런히 하고 다니고 산에 소 꼴메러 가면 남자들과 씨름을 했는데 또래 동네 남자들을 다 이겨서 여장부로 힘이 장사였다”고 옛날 누님들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 추기경을 만났던 동네 어르신은 추기경의 위치가 카톨릭계에서 얼마나 고귀하고 존엄한 자리인지 몰랐던지라 시골의 촌로 어르신의 눈에는 그저 개구쟁이 소년이었던 김수환으로 여겨 “수환이 아이가”하며 반가움을 표현 했다고 회고 하신다.
추기경의 첫째 매형이 되시는 故이윤석은 막내처남 콧물을 닦아 주면서 커서 신부가 되라 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동한이 형 한분만 신부 하면 되지 나까지 할 거 있냐고 했다고 하는 것은 책에도 나와 있듯이 25살 쯤 읍에 가게 하나 내어 어머님께 효도 하고픈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추기경의 생가 마지막 건물주였던 정점봉 어르신은 1993년 3월 31일 추기경이 유년에 살았던 집을 59년 만에 찾아 와서 마당가에서 동네 주민들과 만남을 가졌을 때 과수원에서 일 하시다가 부름을 받고 오셔서 추기경을 만났다고 한다.
“추기경이 내 손을 잡으며 옛집을 헐지 않고 그대로 두어 참으로 감사하다 카대!”
어르신께 어떻게 집이 다 허물어져 갔는데 헐지 않고 그대로 두셨냐고 여쭈었더니 “벌어먹고 산다고 바빠서 못 헐었지 허물라 카만 돈도 들잖아”하시며 “사진 한 장 보여 주까?”라는 말씀과 함께 건네주신 사진 속에는 추기경님과 손을 잡은 모습과 故정채봉 작가의 모습, 초등학교 교사였다가 소년 한국일보 편집국장과 이사직을 겸하고 계셨던 김병규 선생과 동행한 많은 분들의 모습이 사진 속에 남아 있었다.
정점봉 어르신의 부인 되시는 손정분 여사님은 그때 마을 부인들도 추기경님 오셨다고 오라고 했지만 부끄러워서 못 가셨다고 지금 생각하면 한번 가까이서 볼 텐데 아쉽다며 차도 대접 못해 드렸다면서 아쉬워 하셨다.
추기경 집이 여러 주인을 거쳐 손정분 여사님의 시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추기경 집터가 소쿠리터로 돈이 잘 모인다면서 옹기 안에 돈을 넣어서 모았다고 늘 이야기를 하셨다고 한다.
다음호에는 용대리에 옹기가마터 4가구가 운영했던 이야기와 6.25전란으로 피란을 떠나며 미쳐 굽고 있던 옹기를 그냥 두고 떠나야 했던 이야기 등을 실어 드리겠습니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