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모그룹 유병언 회장(73)이 죽었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자연사든 죽은 것은 틀림없다.
“10만 성도 다 잡아가도 유병언을 지키겠다”고 구원파 신도들은 큰 소리를 쳤지만, 유회장은 외롭고 처참하게 매실밭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 되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천문학적인 재산과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을 남겨 두고 갔다. 세익스피어가 ‘햄릿’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라고 했는데, 유회장 역시 살았어도 죽었어도 문제가 많다.
유병언은 1941년 일본 쿄토에서 태어나서, 대구로 건너와 살았기 때문에 고향은 대구다. 이 때문에 대구 경북 출신 인맥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특히 5공화국에서는 민자당의 재정위원을 지내면서 정계 돈줄 역할을 하며, 정관계 인사들을 접촉해서 사귄 것으로 알려졌다.
세월호 참사로 인하여 유회장의 로비대상이었던 사람들은 100여 일 동안 불면의 밤을 보냈을 것이다. 유회장이 정치권에 골프채를 50억 원치 선물 했다는 설들도 있었고, 5공 때부터 정치권에 로비를 해왔다는 것이다.
아마 유회장이 내심 체포되지 않기를 바란 정치권과 관피아들이 많았을 것이다.
유회장과 그동안 유착되어 기생관계를 유지해온 정치권과 관피아 사람들은 유회장이 검경(檢警)에 체포되는 것이 악몽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지난 100여 일 동안 불면의 밤을 보낸 인간들이 이제 유회장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발을 쭉 뻗고 자게 되었다고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유회장은 생전에 항상 돈과 권력이 뒤에 있었다고 한다.
그가 법정관리까지 갔던 세모그룹이 다시 일어서고 2000억 원에 이르는 빚을 탕감 받고 재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누군가가 베풀어준 특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자들은 유회장의 장학금을 받은 인물이 각처에 포진되어 그를 돕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유회장의 장학금 혜택을 받은 인물이 정치권과 법피아, 관피아, 해피아에 포진되어 그를 돕는 후견인 역할을 했다고들 한다.
이 인물들이 바로 유회장이 체포되기를 바라지 않는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유회장이 정상적인 루트를 통하여 사업을 한 인물이 아니고, 로비로 특혜를 받아서 사업을 하여온 것과 종교인을 가장하여 사이비 종교인으로 활동하면서 거부가 되었던 것은 그의 로비를 받고 뒤에서 도운 인물들이 정치권과 관피아와 법피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전방위적인 정치권 인맥이 있다고 하는데 이 정치권 인맥들에게 골프채와 후원금을 얼마나 많이 주었겠는가?
정치권이 “유병언으로 나 떨고 있니를 찾다가 이제 유병언이 사망했다고 하자 후련해졌다”며 쾌재를 부르는 정치인들이 눈에 선하다.
또한 유회장 재산을 차명으로 갖고 있던 분들도 로또복권에 당첨된 행운을 누리는 것이 아닌가? 몽테뉴는 “최상의 죽음이란 미리 예기치 않았던 죽음이다.”라고 했는데, 유병언은 이런 날이 올것을 미연에 알고 재산을 교묘하게 지키기 위해서 차명으로까지 해 둔 것은 좋았으나 자기가 죽을 것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현재 유회장의 사망은 온갖 괴담과 추측만을 양산하고 있다. 결국 국민들이 이 사실에 대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가 유병언의 진짜 사망 시점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혼란스런 가운데 유회장의 사망으로 그의 차명재산 찾기는 더 어려워졌으며, 일련의 사건에 대한 형사처벌도 못해 추징도 불가능 하다고 본다. 공범 관계로 기소된 계열사 대표들이 공판에서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며 유회장에게 책임을 떠넘길 겨우 자칫 유죄 입증이 어려워질 가능성도 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이 있는 선박회사의 선주가 유병언 청해진해운 회장이다. 그는 구원파 신도들을 이용해 수천억 원대 재산을 축적했다. 선박 운항비 등을 아끼기 위해 배를 무리하게 증축하게 하고, 화물을 과도하게 싣도록 했다. 그게 대형 참사의 원인이 됐다.
세월호 사건수사, 참사 피해 보상 등 사고의 근본 책임을 묻는 작업은 세월호보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죽은 유병언은 말이 없고, 뇌물을 받아먹고 전전긍긍 하던 높은 사람들은 이제 편안하게 단잠을 자고 있다.
언론인 이수만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