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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창 시인 |
ⓒ N군위신문 |
삼국유사를 낳은 불교문화의 성지, 인각사! 절 이름도 상서롭다.
인각사는 경북 영천에서 의성으로 가는 28번 국도에 위치한 군위군 고로면 삼국유사로에 있다. 인각사란 절 이름은 “옛날에 기린이 깎아지른 학소대 바위벼랑에 뿔角을 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세월을 훌쩍 넘긴 고찰이다. 멀리서 보면 나지막한 화산자락에 등을 기대어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엎드린 듯도 해 안쓰럽기까지 한다. 외관상으로는 일주문도, 사천왕도 없어 휑한 경내가 적막하고 이렇다 할 볼거리도 없는 조그마한 사찰이다. 봄꽃이 진 뒤 상춘객이 봄의 짧은 절정을 아쉬워하든 지난 오월 하순 부산문인협회 원로 문인들이 2014년 문학기행지로 인각사를 찾았다. 스님이 머물었던 인각사와 문화유적지 답사를 위한 행사라 설레는 마음으로 문학기행에 동행했다.
인각사는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평범한 절집에 불과했다. 그 후 육백여년이 지난 고려 충렬왕 9년(1283)에 78세의 일연스님이 승려로서는 최고의 반열인 국사로 임명되었으나 인각사 부근에 홀로 사시는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인각사로 하안지下安地로 정하자 이듬해 충렬왕은 토지를 크게 하사하였다.
그로인해 인각사는 일약 역사 속에 그 이름이 화려하게 등장한다. 인각사에 주석하게 된 일연국사는 충렬왕의 신임과 재정적 지원으로 전국 불교대회격인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이나 열릴 만큼 구심점 역할을 한 사찰이다. 당시 인각사는 그 많은 사찰 중에 하나의 사찰이 아니라 특별한 사찰임엔 틀림없다.
일연국사는 노모가 아흔여섯에 돌아가시고 충렬왕 15년(1289) 84세로 임종 할 때까지 인각사에 머물면서 삼국유사와 수많은 불교서적을 편찬한 저술가요 시인이다. 삼국유사는 고조선 단군 신화에서 고려 후기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설화와 전설, 야사를 기록한 기사문학記事文學이다.
오랜 세월 선승 행각行脚중 길 위에 흩어져 있는 야사를 채집한 기록문화의 보고다. 또 삼국유사에는 신라 때 향가와 일연스님이 직접 쓰신 수많은 찬시讚詩가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 흥법편에 실린 한글로 풀어 쓴 찬시“순도가 고구려에 오다.”를 옮겨보자.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노 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멀리 날으네/어느 곳 고깃밴지, 안개 속에 이르른 손님.”4행의 짧은 찬시지만 풍경이 손에 잡힐 듯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스님의 불교적, 철학적 사상이 엿보이는 찬시다.
스님 나이 84세(1289)에 입적하자 충렬왕은 보각普覺이란 시호와 정조靜照라는 탑호를 내렸다. 스님 열반 6년 뒤인 1295년 보각국사의 비가 인각사에 세워졌다. 이 비의 비문은 중국 진나라의 서성書聖 왕희지의 유필로 집자集字 되어있다. 지금은 보물 428호로 지정 되었다.
이 비에는 몽고의 침입, 원나라의 지배라는 민족의 수난 속에서 고뇌에 찬 삶을 살았던 일연국사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기념비적인 역사의 보물이다. 안타깝게도 이 비는 왕희지의 글씨 때문에 무절제한 탁본이 계속되면서 크게 마멸되었다.
또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비석의 글씨를 갈아 마시면 국사의 신통력으로 급제 한다는 미신 때문에 더욱 훼손 되었다고 한다. 비를 세운지 700여년이 지나서야 남은 비문이라도 보존한다는 명분아래 나무창살 속에 가두듯이 쇠자물통으로 잠가 놓았다. 깨진 비석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절 한쪽에 오도카니 밀쳐져있는 운명이 애잔하고 쓸쓸하다.
충렬왕의 명에 의해 비문을 짓고 세운 고려의 문신 민지(1248-1326)의 간절한 기원문에는 “겁화劫火가 골짜기를 태워/ 산하가 모조리 잿더미가 되더라도/ 이 비석은 홀로 남고/ 이 비문은 마멸되지 않으리.”이런 절절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비문은 파괴되고, 훼손되고 말았다. 긴 세월 속에 애석한 일이다. 또 국사의 부도와 나란히 하고 있는 돌부처를 바라보면 묵묵한 염화시중 같기도 하고 넙적 바위를 꾹 눌러 앉은 시무룩한 돌인 듯도 하다. 얼굴이 깨지고 부서져 어디가 눈이고 코인지, 돌부처의 허물어진 얼굴에 세월이 무상하다.
그토록 찬란했고 성황을 누렸던 인각사의 옛 모습은 지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일연국사가 주석했던 인각사의 융성했든 흔적은 어디로 갔을까? 인각사는 정유재란(1597)때 왜적의 방화로 송두리 채 소실되고 말았다. 그 때 화려한 역사도, 영화도 함께 타버린 것이다. 신라 때 창건하고 고려 때 융성했던 사찰이 조선시대에 서운瑞運이 퇴락해 대가람이 폐허가 되었다. 허허벌판 쑥밭에 묻혀 인각사란 절 이름마저 잃을 뻔 했다.
참담한 와중에도 인각사는 조금씩 중간되고, 숙종25년(1699)에는 중축되기도 했다. 수 백 년 역사 속에서 산골 초라한 절집으로 전락해 가물거리던 인각사가 역사의 표면으로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은 보각국사의 혼불이 환생하는 건지? 아니면 보각국사의 비를 세울 때 새긴 기원문의 염력 때문인지? 둘 다 너무나 간절해서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2008년에 이르러서야 인각사를 이대로 둘 수 없다는 불교계, 학계, 문화계의 각성으로 인각사 일대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발굴과정에서 신라 때의 금동병향로, 청동향합 등 국보나 보물급으로 평가되는 유물이 적잖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다수의 건물터로 봐서 웅장한 사찰임을 짐작케 했다. 발굴된 석물과 석재들이 파손된 채 지금도 경내에 쌓인걸 보니 가슴이 아프다. 인각사의 복원과 유적의 보존에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근년에 들어 삼국유사와 일연국사의 흔적을 찾는 길손이 인각사에 부쩍 많아졌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인각사가 옛 모습을 찾는다면 스님이 임종 할 때까지 아침마다 인각사 뒷산으로 올라가 어머니 무덤을 향해 절을 올렸다는 이 고을의 전설이 있다. 그래선지 “일연스님의 부도에서 반사된 아침 햇살의 광채가 어머니 무덤이 있는 건너편 묘 비석을 향해 뻗혀 갔다.”는 마을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이왕이면 전설을 소재로 일연스님이 뒷산에서 바라보았다던 스님의 노모가 묻힌 묘 비석까지라도 효도길이란 이름으로 인각사가 조성했으면 좋겠다. 그 길을 자라나는 수많은 청소년들이 밟게 함으로써 스님의 지극했던 효심, 그 정신을 본받게 하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더욱이 스님은 시인이기도해 스님을 추모하는 일연문학상이라도 제정한다면 인각사의 위상이 엄청 달라 질 것이다. 매년 가을이면 삼국유사문화제를 열고 있지 않는가. 인각사의 풍경소리를 그리워하게 하는 일 얼마나 좋은가.
수 백 년 엎드려 죽은 듯 숨죽이고 있던 인각사가 삼국유사문화제를 열고 화려한 부활의 꿈에 새로운 천년을 열고 있다. 군위 댐에서 흘러내리는 위천물이 학소대 벼랑을 끼고 낙동강 줄기 찾아 유유히 흐르듯이 인각사도 삼국유사를 낳은 옛 성지의 영화를 되찾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문화가 융성한 나라, 문화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들의 마음이 이 시대의 휴머니즘이다.
황성창 시인·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