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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소리 鄕歌

admin 기자 입력 2015.01.04 22:47 수정 2015.01.04 10:47

↑↑ 류미옥 해설사
ⓒ N군위신문
지난 12월 21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국악방송과 공동으로 천년의 소리 향가(鄕歌) 음악회를 가졌다.

향가는 신라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시가로서 삼국유사(三國遺事) 14수와 균여전의 11수 총 25수가 전해진다.
우리는 먼저, 이 시대 천년의 소리 향가를 되살리는 음악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천년전에 신라인들이 지어 불렀던 노래이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악곡을 잃어버려 음악적 형식은 알수가 없었다.

승려 일연은 사서인 삼국사기에 실려 있지 않은 향가를 삼국유사에 기록했다는 것은 기록하지 않으면 인간이 만들어 낸 역사는 사라진다고 생각했기 때문 일 것이다.
문화를 알려면 역사를 알아야 한다.

향가 속에는 역사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일연은 역사시대에 기록으로 남겨져 전승되어 오는 향가를 수집 하여 삼국유사에 기록을 하였다.

전해지는 향가 14수는 도솔가, 원왕생가, 제망매가, 도천수대비가, 헌화가, 혜성가, 안민가, 모죽지랑가, 찬기파랑가, 처용가, 원가, 풍요, 우적가, 서동요가 있다.

잊혀져 버린 신라향가(新羅鄕歌)를 국악계의 중진 작곡자 10인이 참여 하였으며 일연스님의 일대기와 삼국유사속의 이야기를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책을 펴내시는 고운기 교수께서 이번 음악회를 위해 발표되는 향가에 곡을 붙이게 된 작곡자들께 자문역할을 해주셨다.

김영만 군위군수님의 인사말씀 중에 향가가 지니고 있는 설화는 역사적 교훈과 음악적 가치, 향가속의 다양한 주인공들의 삶을 통하여 신라인들의 정신과 문화를 알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향가를 제작 하는 사업이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를 알리는 길잡이라 하셨다.

그동안 끊겨졌던 전통악기 공후와 다른 전통 악기들이 어우러지는 연주는 한을 토해 내는 듯이 국악인의 향가 멜로디에 모두가 숨죽이듯 경청을 하였다. 그중, 모죽지랑가 설화는 신라 32대 효소왕때 모량부(현재 경주시 건천읍)가 배경 지역이다.

죽지랑이 데리고 있던 득오가 익선에게 억울한 부역을 하고 있을 때 고생하는 득오를 풀어 주기 위해 수모를 당하면서도 간진의 도움을 받아 득오를 데리고 오게 된다.

이 노래는 득오가(향도) 죽지랑 사후에 지은 향가이며 화랑도 출신 귀족인 죽지랑이 화랑도가 폐지되고 동료들이 축출되는 정치적 상황에서 불우하게 만년을 보내고 효소왕 치세 초반에 이승을 떠난후에 득오가 죽지랑의 장례때나 대상날, 탈상때 사용한 찬가로 지은 것으로 본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실려있는 것은 이러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모죽지랑 설화의 내용은 권선징악으로 익선을 잡아다가 그의 더럽고 추한 마음을 씻어 주고자 했으나 도망 쳐 버리자, 큰 아들을 붙잡아 갔는데 동짓달이라 매우 추운날 성 안의 못에 탐욕스러움을 씻어 주기 위하여 목욕을 시키자 얼어 죽고 말았다.

이말을 들은 왕은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 하는 사람들은 모두 쫏아내고 다시는 관청에도 들이지 않도록 하고 중도 되지 못하게 하였으며 중이 된 자는 큰 절에 가지 못하게 하였다
원측법사(圓測法師)도 모량리 사람이라는 이유로 벼슬을 얻지 못했다.

죽지랑이 살았을 때 지은 시라면 사모시가 되고 죽지랑 사후에 지은 시라면 추모시가 되는 것이다.

35대 경덕왕때는 향가 5편이 지어진다.
경덕왕은 충담에게 그가 지은 유명한 노래 한곡조를 청하였다. 화랑 기파랑을 찬미하며 지은 노래가 찬기파랑가였다.

노래를 듣고난 경덕왕은 충담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다.
“요즘 나라가 편치 못한 기색을 보이고 있소.

나를 위해 백성을 편히 다스리는 노래 한수 지어 줄수 있겠소?“

충담은 주저 하다가 왕의 간곡한 부탁에 그 자리에서 노래를 지어 바쳤는데 대신 그것은 백성을 편히 다스리는 노래가 아닌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노래 안민가 이다.

기파랑은 당시 높은 인격과 올바른 행실로 널리 존경을 받았던 화랑이라고 짐작 할 뿐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경덕왕19(760년) 4월 초하룻날에 갑자기 해가 두 개 나타나 10일 동안 사라지지 않자 민심이 뒤숭숭 했다.

고민하던 왕이 해법을 묻자, 신하들은 인연 있는 스님을 불러 산화공덕을 해야 한다고 건의하여 왕은 불전을 차리고 기다리던 중 스님 월명사가 인근을 지나자 기도문을 부탁했다.

월명은 저는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해 있어 향가만 알뿐 산스크리어트로 된 염불은 잘 모른다고 사양 했으나 향가도 괜찮다 라는 말에 도솔가를 지어 올리니 해가 사라졌다.
도솔은 미륵보살이 사는 도솔천을 상징 하기도 하지만 다스리다 라는 뜻을 지닌 다살의 의미이기도 하다. 국선이라는 말에서 보듯 월명은 화랑이었다.

삼국 통일로 태평성대를 구가한 통일 신라로선 화랑의 효용 가치가 크지 않았다.
입지가 약화된 화랑중 상당수는 승려로 신분을 전환해야 했고 뒤늦게 승려가 된 월명은 법문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제망매가의 주인공인 월명은 피리를 얼마나 잘 불렀던지 가던 달도 멈추었다고 전해진다.
홍상근 문화원장님은 문화유산 콘서트인 천년의 소리 향가 공연관람 후 삼국유사 목판이 복원이 되고 향가도 곡을 붙여 누구나 부를 수 있게 되었으며 향가는 우리 역사문학의 뿌리가 되어 왔음을 알수 있다고 하셨다.

김한우 사무국장님의 사회로 군위문화원 임원과 향토사위원, 군지편찬위원회, 문화관광해설사, 삼국유사 컬쳐텔러 수강생 등 참여했던 모든 분들이 삼국유사의 군민답게 우리고장의 역사와 일연스님의 업적을 새기게 되고 1500년 전에 신라인의 문학과 예술성, 창작성을 되새기는 발표 시간을 가졌다.


-다음편에는 재망매가외 몇편을 실어 드리겠습니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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