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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군위신문 |
용대리 옹기 가마굴을 공동으로 사용했던 4가구를 나이 순서대로 하면 김두성 자손 김대환씨는 대구에 계시고 이경조씨의 선친(故이윤석), 유광오씨의 선친(故유덕수) 정점봉씨의 선친(故정명암) 등 부친들은 생존시 서로 돌아가면서 옹기 가마굴을 사용을 했다고 한다.
용대리 마을에는 전국에서 옹기를 사러 오는 상인들과 기술자들이 모여들었고 마을의 선술집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소달구지에 옹기를 싣고 오가는 활기 넘치는 옹기마을의 풍경 이었다고 한다.
이경조 어르신은 가마굴에 가득 옹기를 넣어 굽는 중에 6.25 전쟁으로 피난을 가야 하는데 가마굴에 불을 피워놓은 상황에서 미쳐 불을 끄지도 못하고 피난을 가야 했다. 그 후, 피난을 갔다가 돌아 와서 가마굴을 확인하니 옹기가 그대로 구워져 있었다고 전하며 그때 구운 옹
기를 팔아서 이경조 어르신의 형님 장가를 들었다고 하시면서 웃으셨다.
“전쟁이 끝나니 옹기가 불티나게 팔렸어. 폭격에 살림살이 가 절단이 났거든. 옹기는 물 항아리, 간장 항아리, 곡식 항아리, 뒷간에도 옹기를 묻어 요즘시대 화장실로 사용 했으니 어디 안 쓰이는 데가 있나! 구워 내기가 바빴지. 이제는 그때 옹기마을의 융성했던 모습들은 다 사라져 버렸지만 내 머릿속에는 그때의 가마 굴터와 농막 여러채, 옹기 건조대까지 생생히 기억이 난다”고 하시며 그때를 회상 하시는 어르신의 모습이 잔잔한 감동이 전해진다.
유년시절 추기경은 옹기장이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아 자랐으며 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날마다 옹기와 포목을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수십리 길을 장사 하러 다니셨는데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을 보는 것을 무척 좋아 했는데 산등성이로 석양이 기우는 풍경은 내 고향이고 내 어머니다.
옹기를 팔러 장에 나간 어머니가 해질녘이 되어도 안 돌아오시면 큰 길로 나가서 어머니가 나타나실 고갯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늘 그 시간이면 서쪽 고갯마루에 석양이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추기경의 바로 위 동한 형이 소신학교에 간 후로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고 밤이 되면 어머니는 보통 1~2시간 기도를 바쳤는데 추기경은 옆에서 뜻도 모른 채 꾸뻑꾸뻑 졸면서 기도 하다가 어머니 등 뒤에서 잠드는 게 특기였다. 기도하기 싫다는 무언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러면 추기경의 어머니는 성서나 옛 성인들의 이야기 또는 우리나라 고담 중 효자전을 들려주시곤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추기경은 속으로 나도 성인이 되고 효자가 돼야지 하고 다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추기경은 찰고(察考)를 앞두고 교리문답을 외워 놓지 않아 어머니께 혼쭐이 난 적이 있었다.
그때 효자전(孝子傳) 이야기가 생각나 버드나무 회초리를 만들어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고 “이 불효자를 때려 주십시오”라고 말하니, 어머니는 매를 드시는 대신 다시 한번 조용히 타이르는 것으로 잘못을 용서해 주셨다고 한다.
동한 형과 추기경이 군위보통학교에 다닐 때 대구 친정을 다녀오신 어머니는 두 자식을 불러 앉히고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다.
대구 시내에서 장엄한 사제서품식 광경을 보고 감동을 받으신 어머니는 “너희는 이 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고 하신 후 형은 이듬해 흔쾌히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초등 5~6학년)로 옮겼다.
추기경도 2년 후 형을 따라 신학교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단지 어머니 명에 따른 것이지 신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
어릴적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을 해서 5~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25살이 되면 장가갈 생각이었는데 어머니한테는 한 번도 말씀 드린 적이 없지만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러나 장사꾼의 꿈은 실현 되지 않았다. 순교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성소(聖召)를 받는 아들이 나오길 기대했던 어머니의 깊은 신앙의 결실로 바로위의 형인 동환과 추기경은 사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추기경은 성장기와 청년기를 거치며 잊을 수 없는 영적 스승 세분을 만나게 된다.
서울 동성 상업학교 시절 프랑스 신부 (故)안토니오 공베르 신부는 추기경이 사제직을 두고 고민할 때 격려 해 준 스승이다. 늘 미소를 잃지 말라고 하시며 (故)공베르 신부는 신부가 되고 싶다고 되고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것은 아니다며 다독여 주셨다
우리나라 포도의 원종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국내에 들여온 분이 (故)공베르 신부이며 안성시에 국내 포도 전래자로서 안성포도의 시원이기도 하다.
또 한분은 일본 상지대 유학시절 만난 (故)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는 독일 출신으로 학도병으로 징집돼 1944년 전쟁터로 떠나는 날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해 주실 때 신부님의 손떨림을 잊지 못한다며 사제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는데 어머니 못지않게 영향을 준 분이 (故)케페르트 신부님이다.
(故)게패르트 신부는 서강대 설립자이자 초대 이사장으로 2002년 (故)게페르트 신부의 장례미사를 추기경이 직접 집전했다.
마지막 스승은 (故)장면 전 총리가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추기경이 시험 답안지에 일제 황국 식민화 정책을 비판하는 답안지를 내자 야단을 치며 뺨을 때리기도 했다.
학교를 폐교 위기로 까지 몰아갈 위험한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맞을 만도 했다며 추기경은 (故)장면 전 총리에 대해서 민주주의 역사가 일천한 이 땅에 그 뿌리를 내리신 분이라 높이 평가한 스승이다.
추기경의 유년시절 어머니의 존재는 절대적 이었다. 깊은 신앙심과 성품이 곧으셨던 어머니는 자식에 대해선 엄한 교육을 하셨고 미래의 운명을 예측해 이끌어 주셨던 스승이 있었기에 가난한 시골 소년에서 세계 최연소 추기경에 오를 수 있었다.
평생 성직자로 사회 전반에 필요한 말씀을 주는 그는 여전히 우리시대 큰 어른이셨다.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 곁에서 큰 사랑을 베풀며 살아오면서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각막기증을 통해 세상의 또 다른 생명에게 빛을 선물하고 나무 묵주 하나만 쥐고 2009년 2월 16일 선종을 하셨다.
59년 만에 어린시절 살았던 군위 용대리 옹기골 마을을 다녀가시면서 하신 말씀을 올려 본다.
“사람에게는 세 사람의 자기가 있지요. 한사람은 남이 아는 자기이고 또 한사람은 자기가 아는 자신이고 나머지 한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자기 이지요. 바라건대, 내가 이 일을 하는 동안 남들이 아는 나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나보다 내가 모르는 내가 진실로 나타나서 쓰일 수 있는 자기가 되기를 기도 합시다.”
이 시대에 남겨진 우리에게 삶의 철학을 남겨 주신 말씀 아닐까! 생각한다.
추기경 생가를 찾아오시는 전국에 많은 관광객들은 무진박해로 순교를 당하신 조부와 조모인 강말손 여사의 헌신적 교우들을 보살펴 주는 박애정신과 추기경이 59년 만에 생가를 찾아와 마을어른이 전해 주셨던 누님들 이야기를 들어 시고 행복해 하셨던 이야기며, 유년에 개구쟁이 이야기, 옹기장사를 하시던 부모님이야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
2003년부터 2009년 선종 할 때까지 추기경님의 이발을 맡아 해 주셨던 혜화동 이흥억 이발사는 어느 고객이 추기경의 머리를 이발할 때 머리카락을 버리지 말고 모아 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 2008년부터 모아둔 추기경의 머리카락이 400봉지나 되었다.
자칫 버려질 머리카락도 추기경의 유품으로 남아 있어 생가 방문객에게 들려줄 스토리텔링이 되었다.
군위군은 추기경생가 주변을 ‘사랑과 나눔’이라는 주제로 테마공원이 조성이 된다. 추기경 추모관과 청소년 수련관, 옹기 가마굴 복원이 조성되면 추기경의 사랑과 나눔정신의 문화의 장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추기경 이야기를 실으면서 마을의 변천사를 모두 알고 계시는 어르신들이 계시기에 생생히 추기경님의 가족사를 알게 되었고 옹기마을 형성과 유년의 생활사 까지 들을 수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고고학을 하시는 분들은 마을 어르신들이 한분씩 돌아가실 때 마다 박물관 하나가 없어진다고 안타까워한다. 어르신들이 시대적 상황을 경험하고 기억하고 계시는 근현대 역사를 우리 후세인들은 기록하여 남겨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특히, 큰 도움을 주셨던 이경조, 정점봉 어르신 정말 감사합니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