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N군위신문 |
해마다 10월 초가 되면 울산시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설화 속에 전해 오는 특별한 인물을 기리는 축제가 열리는데 바로 처용 문화제이다.
축제일이 되면 울산 사람들은 처용이 처음으로 나타났다는 개운포 성지에 제단을 마련하여 처용신을 모시고 주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처용무를 추고, 처용 모습의 가면 페스티벌과 다양한 행사들도 펼쳐진다. 개운포 성지는 울산 외강항 하구에 위치하여 있다.
처용이 어떤 인물이기에 해마다 울산에서는 이처럼 성대한 축제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 이야기를 살펴보며 의문을 풀어 가보도록 하자.
처용가는 신라49대 헌강왕 시대이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설화로 잘 알려진 신라 48대 경문왕이 헌강왕의 아버지이다.
어느 날 헌강왕이 바닷가를 유람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잠시 바닷가에 멈추는데 대낮인데도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끼고 어둑어둑해져서 길을 잃었다.
왕이 이를 괴상하게 여겨 주위 신하에게 묻자 일관(日官 천문을 맡은 관리)이 말하길 “이는 동해 용이 조화를 부린 것으로 좋은 일을 베푸시어 용의 심술을 풀어 주라”고 하였다.
왕은 담당관리 신하에게 일러 그 근처에 용을 위한 절을 짓게 하라고 명을 내렸다. 왕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져 다시 맑아졌다. 이로 인해 그곳을 개운포(開雲浦)라 불렀는데 구름이 걷힌 포구라는 뜻이다.
그 후, 동해용왕이 기뻐하며 일곱 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헌강왕은 경주로 돌아오면서 용왕의 아들 가운데 한명인 처용을 데리고 와서 급간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미인을 아내로 삼아 오래도록 대궐에 머물도록 하였다.
먼저, 8구체 향가인 처용가(處容歌)의 내용을 살펴보자.
서울 밝은 달밤에 / 밤새도록 놀며 다니다가 /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 로다
둘은 내것이건마는 /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할꼬
위의 내용으로 보아 처용이 밤늦도록 놀다가 집에 들어 와 보니 아내가 다른 남자와 간통을 하고 있었는데 처용은 오히려 그 장면을 보고 마당에 나와 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자 화를 낼 줄 알았던 처용이 오히려 관용을 베푸니 사람으로 둔갑한 역신도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역신은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처용씨 내가 당신에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당신이 있는 곳에는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심지어 당신의 얼굴이 그려진 곳에는 절대 나타나지 않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때부터 마을에 전염병이 돌면 처용의 얼굴을 그려서 집집마다 붙여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전통이 오랫동안 이어져서 무당들은 부적을 쓸 때 전염병을 쫓기 위해서 처용에게 기도를 드리고, 처용무를 추며 처용의 노래를 부르고 처용의 얼굴을 그려서 붙여 놓았다고 한다.
그러면 그 전염병은 처용을 보고 도망을 갔는데 여기서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처용의 그림들이 많이 전해졌는데 코가 매우 크고 턱이 굉장히 큰 우락부락한 인상의 이국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역신은 누구이며 역신을 굴복시킨 처용의 정체를 밝혀 보자.
역신은 신라를 공포에 떨게 했던 전염병을 옮기는 귀신으로 그 당시 장티푸스(장질부사)의 종류중 하나다.
처용은 동해 용왕이 데리고 온 일곱 아들 중의 하나이며 동해에서 왔다는 것은 처용이 원래 신라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 동해를 통해서 들어온 서역인으로서 그 당시 경주는 아라비아와 활발한 교류 흔적이 있었으며 신라의 수도 경주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국제적인 도시로서 개운포는 먼 나라와 교역하는 무역항 이었다.
헌강왕이 처용은 단순한 장사치가 아니라 비범한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높은 벼슬을 주고 미인과 결혼 시켜 붙잡아 두고자 했을 것이다.
바다에서 온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없는 의술을 가지고 전염병을 고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얘기가 전해지고 전해지다 보니까 처용이라는 사람이 오는 마을에서 전염병이 꼼짝 못하더라, 역신이 그렇게 했다더라 이런 식의 이야기가 전해지게 된 것이다.
어떤 학자는 당시 의술, 화학술, 산술 등이 발달한 문명국에서 온 처용은 신라인들 보다 많은 의술을 알고 있었을 거라 추정하고 있다.
처용가는 구지가나 해가로부터 이어지는 주술시가의 맥을 잇고 고려가요 처용가의 모태가 된다.
처용가는 벽사진경(辟邪進慶) 으로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들이는 성격을 지닌 본격적인 무가의 기원이 되며 관용적인 태도로 역신을 감동 시키는 이것이 처용가의 핵심이다.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질병을 퇴치하는 문신이 되어 신라사람들의 가정에 복을 가져다주는 믿음에 왕은 처용과 용왕을 위하여 절을 세우는데 그 절이 ‘망해사’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처용설화를 보면 실제로 헌강왕때 경주는 왕족과 진골귀족들이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곳곳에 도적들이 생겨나고 백성들의 생활은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수 있다.
비범한 자질로 인하여 신라인들의 신앙적인 숭배의 대상이 된 처용의 모습은 신라인들에게는 역신을 물리친 사나이로 남아 있을 것이다.
군위군 문화관광해설사 류미옥